▲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 컨설턴트/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2012년 말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다. 노조 교육을 위해 자카르타를 방문했는데, 현지 여성간부가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 당선을 축하한다고 했다. 뭐가 축하할 일이냐 물으니, 여성 대통령이 돼 여성노동자를 위한 정책이 실현되는 것 아니냐며 기대를 표명했다. 여성이 대통령이라는 것과 여성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것은 다른 문제라 말하니,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에 대한 실망인지, 박근혜에 대한 실망인지 잘 모르겠다.

청년유니온이 생겼을 때다. <88만원 세대>를 열독한 청년 노조간부가 청년유니온이 생겼으니, ‘꼰대’가 장악한 기존 노조와 달리 청년 노동자를 위한 노동조합 활동이 활발해지고 청년노동자의 일과 삶이 의미 있게 개선될 것이라 했다. 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말해 줬다. <88만원 세대>식의 세대론적 접근법으로는 얽히고 설킨 노동 문제를 풀 수 없으며, 세대 관계가 아니라 계급 관계의 접근법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하니,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88만원 세대> 저자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나에 대한 실망임은 분명했다.

시간의 흐름은 답을 준다. 박근혜 정권 5년 동안 여성노동자의 삶이 나아진 것은 별로 없다. 여성노동자의 삶은 전체 노동자의 삶이 나아질 때 개선될 수 있다. 박근혜 구속을 사과하면서 그녀를 치켜세우는 윤석열 정권하에서 여성노동자의 삶은 악화하고 있다. 전체 노동자의 삶이 나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라 다 같은 게 아니다. 부자가 있고 빈자가 있다. 자본가가 있고 노동자가 있다. 예를 들어, 출산과 양육이라는 현상은 같으나 그 문제를 관통하는 본질은 다르다. 출산과 양육에서 자본가 여성은 사유화된 시장을 선호하는 반면, 노동자 여성은 보편적 사회복지가 이롭다. 청년도 마찬가지다. 부자 청년과 빈자 청년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사회적 존재다.

여성 문제와 청년 문제가 중요하지만, 노동 문제와 계급 문제보다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여성의 노동 문제가 여성노동자와 남성노동자를 분리시키는 방법으로 해결될 수 없듯이, 청년의 노동 문제 역시 청년노동자와 중장년 노동자를 분리시키는 방법으로 해결될 수 없다.

노동운동에서 청년 담론과 여성 담론은 중요하지만, 노동과 계급 문제를 중심에 둘 때만이 청년과 여성 문제도 해결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 꼬리가 머리를 흔들 수 없는 게 세상 이치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청년과 여성 문제가 우선 과제로 제기될 수 있으나, 본질적이고 지배적인 문제는 노동과 계급 문제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노동운동은 다수자 운동일 때 성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노동운동이 소수자 운동을 자처하는 것은 일종의 자해 행위다. ‘조직노동’(organised labour)이 갖는 구심력을 약화시키고, 대중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을 중산층 주도의 시민사회운동으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운동은 사회적 주류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려 할 때 성공을 향해 한걸음 다가갈 수 있다. 노동운동이 비주류로 자처하는 것도 일종의 자해 행위다. 이는 시민사회운동을 주도해야 하는 노동운동의 임무를 방기케 하며, 결과적으로 노동운동을 시민사회운동의 일부로 위축시킨다. 그리고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이어야 한다는 운동론과,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의 일부여야 한다는 다원주의는 구별해야 한다. 이는 ‘사회적 노동조합주의’(social unionism)와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social movement unionism)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지난 문재인 정권 이래 목격되고 있는 노동을 ‘일하는 시민’(working citizens), 즉 ‘근로 시민’으로 대체하려는 흐름도 우려되는 현상이다. 계급으로서의 노동을 시민으로서의 노동으로 해체하려는 시도는 새로운 것은 아니며, 18세기 말 프랑스대혁명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다. 당시 혁명가들은 시민과 자유라는 미명하에 노동자 집단을 개별 시민으로 쪼개려 했다.

노동운동이 성공과 승리를 원한다면, 노동을 여성과 청년과 시민으로 쪼개려는 신자유주의적 다원주의 담론을 극복해야 한다. ‘조직노동’으로서의 응집력과 구심력을 중시하는 계급 담론의 원칙을 견지하되, 실천적으로 그 내용을 풍요롭게 만들 필요가 있다.

아시아노사관계 컨설턴트/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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