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환경건강센터 소속 산업위생기사가 대구 B업체의 작업장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구은회>

대설주의보로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은 지난 9일 부산과 대구를 하루에 찍고 돌아오는 빡빡한 출장길에 올랐다. 목적지는 일환경건강센터가 얼마 전 국소배기장치를 교체해 준 영세 제조업체 두 곳이다. 새로 설치한 장비가 문제없이 작동하는지, 불편한 점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이날의 출장은 한 건의 공문으로부터 시작됐다. 두 달 전 ‘작업환경개선 지원사업 후보사업장 추천’이라는 제목의 공문이 센터에 접수됐다. 발신인은 근로복지공단 직업환경연구원. 공단처럼 큰 기관이 우리같이 작은 센터에 무슨 볼일이지? <무사안일> 네 번째 사연은 공공·민간 직업병 전문가들이 의기투합한 이야기다.

직업병 역학조사기관에서 온 ‘뜻밖의 공문’

직업환경연구원은 우리나라 양대 역학조사기관 중 하나다. 노동자가 직업병으로 산재신청을 하면, 근로복지공단은 질병과 업무의 연관성을 살피는 재해조사를 하고 필요시 역학조사를 의뢰한다. 의뢰를 받은 직업환경연구원은 호흡기질환 등 일반질병의 업무연관성을 주로 확인한다. 조사결과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산재 여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또 다른 역학조사기관은 안전보건공단 산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다. 직업성암 같은 신규·희소질병 관련 역학조사나 규모가 큰 역학조사를 담당한다. 역학조사 접수건수는 두 기관을 합쳐 연간 600여건에 이른다.

직업병으로 산재신청을 해본 노동자들에게 역학조사기관은 ‘빌런’의 이미지다. 조사에 걸리는 기간이 길어도 너무 길다. 2022년 기준 직업환경연구원의 역학조사 소요기간은 평균 436.7일,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평균 664.4일이다. 역학조사 결과를 기다리다 노동자가 사망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이런 이유로 역학조사 장기화 문제는 국정감사나 미디어에 자주 소환되는 단골 소재가 됐다. 해결방안으로 ‘업무상질병 추정의 원칙’ 적용 확대나 ‘상병수당제도’ 도입 등이 함께 거론된다. 그러나 첨예한 논쟁을 동반하는 이슈들이어서 사회적 합의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역학조사가 끝난 작업장을 고쳐 달라고?

그나저나 직업환경연구원은 역학조사와 아무 관련 없는 일환경건강센터에 무슨 용건이 있었던 것일까. 건조하게 작성된 문서를 읽어 내려가니 행간에 담긴 전후 사정이 눈에 들어왔다. 일이 진행된 시간 순서대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 역학조사 연구원들이 영세사업장에 직업병 역학조사를 갔다.

2. 조사 결과 업무와 질병 사이의 연관성이 높지 않았다.

3. 조사 사업장의 작업환경 관리상태는 매우 열악했다. 환기설비가 미흡해 노동자들이 유해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4. 사업장 두 곳을 추천하니 일환경건강센터가 작업환경 개선에 나서 주면 좋겠다.

연구원이 추천한 사업장은 부산 A업체와 대구 B업체다. 두 회사 모두 상시 고용인력이 10명 이내고 안전보건관리자는 따로 없었다. 산업안전보건의 사각지대 한가운데 있는 영세업체들이다.

부산 A업체는 피혁가공업체다. 작업화용 가죽에 색을 입히기 위해 유기용제 등 화학물질을 배합하는 공정에서 디메틸포름아미드(DMF)를 사용한다. DMF는 피부·호흡기·소화기를 통해 체내에 흡수돼 급성 간독성을 일으키는 위험물질이다. 이 회사에 근무했던 이아무개씨가 폐암으로 산재신청을 낸 것이 계기가 돼 역학조사가 시작됐다.

대구 B업체는 산업용기계 제작업체다. 군용탄띠나 허리띠, 산업용 안전벨트처럼 폭이 좁은 직물을 짜는 세폭직기가 주력제품이다. 금속을 자르거나 깎는 절삭 공정과 금속의 표면을 반들반들하게 갈아내는 연삭 공정에서 수용성 절삭유를 사용하고, 기계 조립공정에서 용접봉을 사용한다. 이때 발생하는 금속분진과 용접흄은 폐질환을 유발하는 위험물질이다. 이 회사에 근무했던 김아무개씨가 특발성 폐섬유증(IPF)으로 산재신청을 낸 것이 계기가 돼 역학조사가 진행됐다.

일환경건강센터 소속 산업위생기사가 부산 A업체의 작업장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구은회>
▲ 일환경건강센터 소속 산업위생기사가 부산 A업체의 작업장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구은회>

산재심사 끝나면 용도 폐기되는 역학조사 보고서

역학조사 연구원들은 선행연구와 재해사례를 검토하고, 조사 사업장의 작업내용과 공정·작업환경·유해물질 노출 여부 등을 확인해 결과보고서를 작성한다. 바꿔 말하면, 영세한 사업장들은 산재신청을 계기로 이뤄지는 역학조사를 통해 어쩌면 창사 이래 최초로 작업환경 종합 진단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영세사업장 생생 리포트’ 격인 역학조사 보고서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참고자료로 쓰인 뒤 사실상 용도 폐기된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정부 관리·감독의 손길이 닿기 힘든 영세기업에 의사 등 전문인력이 직접 찾아가 국민세금을 써 가며 만든 보고서를 이렇게밖에 활용하지 못하다니 기막힌 일이다.

산재신청을 했던 A업체와 B업체 노동자 중 한 명은 산재인정을 받지 못했다. 산재보상 차원에서 보면 고통은 오롯이 해당 노동자의 몫이 됐다. 그런데 산재예방 차원에서 보면 질병과 업무의 연관성이 밝혀지지 않은 것뿐이지, 이들 사업장이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역학조사가 끝나도 위험은 계속된다.

직업환경연구원이 일환경건강센터에 손을 내민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센터의 영세사업장 재해예방 지원사업을 이용해 영세업체 노동자들이 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다.

센터는 연구원의 제안을 수용했다.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역학조사를 통해 파악된 사업장 정보를 바탕으로 센터 소속 산업위생기사들이 현장실사에 나섰다. 유해물질 노출 가능성이 큰 공정의 국소배기장치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후드·덕트 등 설비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후드 주변에 비닐커튼을 둘러 유해물질이 작업공정 밖으로 새 나오지 않도록 이중으로 차단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영세업체에 환기시설 바꿔 주는 정도는 근로복지공단이 알아서 하면 되는 일 아닌가? 정부가 할 일을 민간단체에 맡기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산재예방기구인 안전보건공단의 예산과 인력을 활용하면 되는 일 아닌가?

대구 B업체의 한 노동자가 금속을 깎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구은회>
▲ 대구 B업체의 한 노동자가 금속을 깎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구은회>

역학조사 결과가 재해예방사업으로 이어지도록

문제는 분절적인 산재행정시스템이다. 산재보상업무는 근로복지공단, 산재예방업무는 안전보건공단으로 분리된 상황이다 보니 역학조사 결과가 재해예방사업으로 이어지는 길목이 막혀 있다. 길을 뚫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역학조사를 통해 문제점이 파악된 사업장의 경우 안전보건공단 ‘클린사업장 조성 지원사업’의 우선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일종의 패스트트랙이다. 고용노동부도 영세사업장 지원사업을 추진할 때 역학조사 결과를 똑똑하게 써먹을 필요가 있다. 위험이 검증된 사업장이 그 안에 수두룩하다.

당장의 제도개선과 예산확보가 어렵다면 공공과 민간의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수 있다. 양대 역학조사기관을 중심으로 작업현장 접근성이 높은 공공·민간단체들이 영세작업장 감시체계를 꾸리는 것이다. 전국의 근로자건강센터·일환경건강센터 같은 민간단체, 경총·중소기업중앙회 같은 사용자단체, 작업환경측정기관 관계자 등이 한데 모여 영세사업장 정보를 공유하고 지원업체를 선별하는 방식이다. 사용자단체들이 영세한 기업들을 위해 비용을 분담하는 미덕을 보여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 구은회 일환경건강센터 PL
▲ 구은회 일환경건강센터 PL

이쯤 되면 흐지부지돼 버린 산업안전보건청 설립 논의가 못내 아쉬워진다. 2020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노사정 합의와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입법으로 급물살을 탔던 산안청 설립 논의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자취를 감춘 상태다. 산안청으로 상징되는 통합행정시스템 안에서 영세사업장 재해예방을 위한 합리적 조정이 이뤄졌다면 어땠을까. 꼭 산안청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형식이 무엇이든 막힌 길을 뚫는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일환경건강센터 PL (tokki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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