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국가보훈부가 최근 이승만 전 대통령을 내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발표하자 언론의 반응은 엇갈렸다. 경향신문은 지난해 12월26일 4면에 “‘과(過)’도 있는데 … 이승만 추앙하는 윤 정부”라며 정부를 비판했고, 한국일보는 같은 날 8면에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이승만 논란”이라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 1면에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제 와서야 선정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라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이승만이 진즉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돼야 했고 주장했다.

이승만만큼 논란의 인물도 드물다. 조갑제는 자기 책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한길사, 1987)에서 해방 후 일제 고등경찰과 헌병들의 변신 과정을 소개하면서 이승만을 “독재자”라고 비난했다. 그는 책 9쪽에 “이승만 독재정권 아래서 일제 경찰 출신들, 그중에서도 특히 고등계 형사 출신들은 정권의 3대 파수꾼인 경찰, 특무대, 헌병의 중추부를 장악, 폭력배들을 외곽집단으로 이용하면서 권력에 충성을 다하였다”고 기술했다. 같은 조갑제씨는 2007년 7월 교육방송 EBS에 출연해 이승만을 “국군을 만든 건국의 아버지”라고 칭송했다.

사상계와 동아일보 기자로 출발해 군사정부 때 야당 국회의원을 3번 지낸 손세일은 1970년에 쓴 책 <이승만과 김구>를 2008년에 개작해 세 권으로 펴냈다. 손씨는 1970년 책의 첫 소제목을 <‘나는 왕족’과 ‘나는 상놈’>으로 달만큼 두 사람의 극명한 차이에 주목했다. 손씨는 1970년 책에서 “이승만의 정치형태는 (중략) 전제군주에 가깝다”며 그 기원을 “그의 의식 속에 잠재하는 왕족 의식”에서 찾았다. 손씨는 “이승만이 양녕대군의 17대 손”이라며 왕족임을 강조한 반면 “김구는 극빈의 서민 출신”이라고 대비했다.

그랬던 손씨는 2008년엔 같은 제목의 책 3권을 펴내며 조선일보 인터뷰에 “이승만과 김구는 둘 다 건국의 아버지”라고 태도를 확 바꿨다.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 손씨는 2008년 9월29일자 한겨레 인터뷰에 생각이 변한 이유를 밝혔다. 손씨는 한겨레에 1970년대 자신의 이승만 평가를 “젊은 저널리스트의 오만과 시대적 에토스(특징)의 소산”이라고 했다.

젊은 날의 자신을 되돌아보고 생각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 ‘왕족 이승만과 상놈 김구’라고 양극단으로 평가했던 두 사람을, 늙어서는 ‘둘 다 반공·자유주의에 투철했던 애국자’고 바꾼 건 쉽게 납득이 안 된다.

이승만은 1897부터 1904년까지 무려 7년, 김구는 1896~1898년과 1911~1915년 2번을 합쳐 6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승만은 독립협회에서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다가 왕정의 탄압으로 투옥됐다. 투옥된 이승만은 권총을 구해 잠시 탈옥했다가 다시 체포돼 사형수를 거쳐 종신형으로 감형됐다. 이승만이 감옥에서 1904년 쓴 ‘독립정신’은 과격하기 이를 데 없다. 반면 김구는 1896년 첫 투옥때 “국모 폐하께옵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는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다”며 손톱으로 제 이마에 ‘충(忠)’을 새겼다. 청년 이승만은 왕권을 거부했고, 청년 김구는 왕에게 충성을 다짐했다. 이만큼 달랐던 두 사람의 행보는 이후 더 극명하게 엇갈린다.

조선일보는 이승만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이유를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내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정부를 수립하고, 6·25전쟁을 극복하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경제 번영의 기틀을 닦았다”고 했다. ‘독립운동’ 공적을 기려 뽑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에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 대한민국 경제 번영이 왜 나오냐.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은 어떻게 할 건지.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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