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대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대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의 50명(억원)미만 사업장 적용(1월27일)을 보름 남짓 앞둔 지금까지도 정부와 여당, 재계는 적용유예 기간 연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25일 한 번의 국회 본회의가 남았으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자세다. 재계의 연이은 입장표명에 이어 지난 9일 정부는 관계부처 합동으로 “전면시행 전까지 적극적인 개정안 논의 및 신속한 입법 처리를 간곡히 요청드린다”는 정부 입장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전면적용을 위한 최종점검을 하고 있어도 모자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불안과 혼란뿐이라니. 정부와 재계의 책임은 말할 것도 없으나 더불어민주당 역시 상황을 여기까지 만들어온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노동자와 시민의 생명을 협상테이블에 올린 것부터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2년 후에 추가연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약속’이라니. 마트 과자코너에 누워 생떼를 쓰는 아이 달래듯 ‘이번이 마지막이야, 약속!’을 외치는 야당, 선심 쓰듯 약속하며 생색내는 경제단체들. 우리 정치의 한심한 수준에 부끄러울 따름이다.

정부와 재계는 줄기차게 영세사업장의 취약성과 어려움을 강조한다. 그들이 언제 이렇게 영세사업장을 걱정했는지 낯설기만 하지만 진심으로 영세사업장의 취약성이 걱정이라면 ‘중소·영세 사업장은 왜 이토록 취약한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한다. 왜 50명 미만 사업장들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폐업의 문턱을 오가야 하는가? 왜 이곳의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으로 숨만 쉬고 살아야 하는가? 왜 80.4%(2021년 1월~2023년 9월 기준)의 산재 사망사고가 50명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하는가? 영세사업장을 영세하게 만드는 것, 영세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 다단계 원·하청구조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착취이다.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영세사업장의 취약성은 결국 그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원청대기업들은 중소·영세 사업장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성장해 왔고 그 희생에는 당연히 수많은 산재사망 노동자들도 포함돼 있다. 정치권 역시 여야를 막론하고 수십 년간 이 문제를 외면해 온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부는 9일 발표한 입장문에서 “50인 미만 기업 대다수는 영세기업 특성상 대표가 경영의 모든 부분을 책임지며, 중대재해로 대표 처벌시 폐업뿐만 아니라 일자리 축소로 인한 근로자 피해 등을 우려하며 적용유예를 호소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하루아침에 수많은 종이빨대 제조업체를 폐업시킨 정부의 ‘영세사업장 걱정’을 어떻게 받아줘야 할까? 대기업이 모든 이익을 빨아들이는 구조, 그로 인한 영세사업장의 취약함, 이에 대한 정치의 책임을 애써 외면하니 남는 것이라곤 ‘아이고, 불쌍한 우리 영세업체 사장님들 좀 봐주세요’ 수준의 이야기뿐이다. 그 사장님들 불쌍하게 만든 게 누군지는 왜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가?

대책을 논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영세사업장이니까 영세하고, 영세하니까 취약하다는 말장난 수준의 진단으로는 대책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영세사업장이 단순히 안전관리자가 없어서, 컨설팅을 못 받아서 안전보건관리가 안 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대기업이 강요하는 생산성을 영세사업장들이 어떻게 달성해 왔는가? 생산속도를 높이기 위해서 안전센서를 꺼 놓고 작업하다 설비에 끼어 죽고, 싸구려 화학물질을 뭔지도 모르고 쓰다가 급성중독으로 죽고, 고소작업대 빌릴 돈 아끼려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다.

너무 우울한 이야기만 했다면 거꾸로 생각을 해 보자.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영세사업장에서 안전보건관리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철저한 안전보건관리는 필연적으로 생산성의 희생을 동반한다. 아니, 줄어든 그 상태가 바로 ‘정상적인’ 생산성이다. 그때 우리는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사람 살리기 위해 줄어든 생산성의 대가는 누가 치러야 하는가? 지금까지 생명과 건강을 희생해 온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인가? 그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성장해 온 원청대기업들인가? 여기서부터 우리는 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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