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철 한국노총 부천노동상담소 상담실장

갑진년 새해 첫 상담은 해고예고도 없이 잘린 어느 50대 노동자 이야기다. 노동자는 사업주를 고용노동지청에 신고했지만 노동지청은 아무 조치도 없이 사건을 끝냈다고 한다. 그는 분통을 터뜨리며 “해고예고 수당을 좀 받아 달라” 애원했다. 사건 종의 사유가 뭐냐 물었더니 “피진정인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서”라고 쓰여 있더란다.

신병을 확보하고 사실관계를 조사해 피해 노동자의 권리를 구제해야 할 노동지청 근로감독관이 가해자가 어디 있는지 몰라 사건을 마무리하겠다니. 귀를 의심했다. 이처럼 상담소 문을 두드리는 임금체불 피해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우리에게 바란다. “노총에서 사업주 만나서 두들겨 패든지 해서 돈(체불임금) 좀 받아 주면 안 되요?”

노조의 직접 개입을 바라는 상담의뢰인들을 보며 최근 ‘배드파더스’에 대한 대법원 판결과 유튜브에서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참교육’이 떠올랐다.

최근 대법원 제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이혼 후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부모의 신상을 공개한 배드파더스의 운영진에 유죄 판결했다. ‘배드파더스’는 양육비 지급 의무를 회피하는 부모 약 2천500명의 신상공개를 통해 사회적 비난을 야기해 양육비 지급을 강제했다. 실제 ‘배드파더스’의 신상 공개 이후 약 1천여명의 부모가 양육비를 지급했다고 알려졌다. 법원은 이러한 행위가 양육비 공론화라는 공익이 있지만 대상자의 인격권을 훼손했다며 운영진에게 벌금형을 선고했다.

유튜브에서 130만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카라큘라 범죄연구소’ 채널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여러 사건을 직접 조사해 가해자의 신상을 공개하고 범죄혐의를 폭로한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인근에서 롤스로이스로 행인을 치어 숨지게 한 가해자 사건이나 전세 사기, 중고 차량 매매 사기로 피해를 본 피해자의 제보를 접하고 현직 변호사 등 전문가와 협업해 해당 가해자와 접촉해 직접 피해자의 피해복구를 시도한다.

수십만 구독자를 보유한 ‘엄태웅tv’의 운영자인 전직 격투기 선수 엄태웅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조직폭력배의 폭력이나 협박 피해 사건을 다룬다. 인천 검단신도시에서 자녀들 앞에서 부모를 폭행한 폭력배를 상대로 그의 거주지 앞에서 피해자에게 사과하라고 집회를 여는가 하면, 술값을 떼먹고 도망간 폭력배에게 전화 통화를 시도해 사회적 비난을 경고하며 술값을 갚게 한다.

이른바 ‘참교육’이라 불리는 이러한 방식의 사적제재에 구독자는 열광한다. 구독자를 늘리기 위한 자극적 방송이란 비판도 있지만 ‘느리고 불공정하다’ 인식되는 사법기관의 행정처리에 분통을 터뜨려 온 시민들은 온갖 욕설과 협박으로 가해자를 꾸짖고 가해자로 하여금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피해를 보상케 만드는 이들의 활약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새해부터 법률이 금지하는 사적제재에 주목한 이유는 무고한 시민의 피해를 구제하는 데 미력하고 늑장을 부리는 국가 공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었다는 우려가 들기 때문이었다.

대법원 판결 직후 언론 앞에 선 배드파더스 운영진은 “양육비를 주지 않기로 마음먹으면 양육비 책임을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다”며 현행 양육비 지급 제도의 맹점을 비판했다. 이번 판결로 “피해 양육부모의 선택에 따라 소액의 벌금을 감수하고 신상 공개를 계속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고사법기관의 준엄한 판단에도 양육부모와 자녀에게 생존권의 문제인 양육비를 개인 사이 채권 관계로 바라보는 안일한 인식에 대한 서늘한 경고였다.

20여 년 전 공영방송의 ‘좋은 나라 운동본부, 임금체불과의 전쟁’이라는 제목의 공익프로그램에서 우리 상담소는 제작진과 함께 임금체불 사업주를 직접 찾아가 사건 해결을 도모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임금체불 피해 노동자의 의뢰를 받아 노총 변호사와 공인노무사를 대동하고 체불 사업주의 재산을 조회해 압류도 걸고 으름장도 놓는 그런 현장출동 상담을 해야 하나 고민이 드는 시점이다.

한국노총 부천노동상담소 상담실장 (leesey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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