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민석 자유기고가

1832년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목사로도 알려진 칼 귀츨라프(Karl Gützlaff)는 오랫동안 중국에 머물다가 태평천국운동이 벌어질 무렵 20년 만에 유럽 사회에 돌아왔을 때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조를 접하게 됐다. 이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그는 놀라서 외쳤다. “나는 그 유해한 교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가? 바로 이와 동일한 것이 중국에서 많은 폭도들에 의해 한동안 설교됐다!” 칼 마르크스는 이 일화를 그저 ‘양극단은 일치한다’는 변증법의 원리를 증명해 주는 사례로 넘겨 버렸지만, 이 문제는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역사 발전의 최전선에 위치한 자본주의에서 그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 나온 사회주의와, 역사발전의 최고(最古) 단계에 있던 아시아적 공동체의 ‘사회주의’ 사이의 이 ‘기묘한’ 일치. 런던에 거주하며 세상을 바라보던 마르크스에게는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을지 몰라도 자국의 ‘후진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던 비유럽 지역의 혁명가들에게는 심각한 문제로 다가왔다. 이미 20세기 초에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레닌부터가 플레하노프로부터 러시아의 ‘아시아적 특질’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레닌의 뒤를 이은 스탈린은 아예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을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제거함으로써 저명한 중국사 연구자인 비트포 겔(K. Wittfogel)이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이탈하게 만들었다.

비록 아시아적 특질에 대한 해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지라도 ‘후진적인’ 아시아가 혁명을 매개로 역사발전의 최전선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후진국 지식인들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상당히 매력적인 대안으로 느껴질 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해 동아시아에서는 1920~30년대 이래로 중국의 ‘사회성격 논쟁’, 일본의 ‘자본주의 논쟁’, 그리고 1980년대 한국의 ‘사회구성체 논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론적 논의와 그에 따른 실천이 행해졌다. 비록 누군가의 지적처럼 자본주의 자체를 비판하지 못하고 자본주의를 실현하지 못하게 하는 주변부적 특질에 집착한 ‘잘못된’ 논쟁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시아적 특질에 대한 논의는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보편적 과제와 자국의 후진성이라는 특수한 과제를 접목시키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선거철을 앞두고 범진보진영에서는 다시금 백가쟁명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선진국 한국’이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자국의 특수성을 ‘후진성’의 형태로나마 사유하려는 시도는 사라지고 없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일본의 강좌파와 노농파의 대립이 일본 자본주의의 선진화 속에서 스러진 것처럼, 한국의 주변부성에 대한 논의도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라진 듯하다. 특수성에 대한 사유가 약해져서일까. 이제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역사발전의 최전선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보편적 문제의식조차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한국적 현실에서 다시금 ‘아시아적 특질’에 대해 사유한다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일찍이 마르크스가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을 제기하면서 비판적으로 사유하고자 했던 부분에서 출발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한다. 아시아에는 개인과 국가 사이에 중간적 집단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국가와 개인을 초월해 독자적인 공동체로서 기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해 국가의 ‘권위적인 결정’에 종속돼 있다. 헤겔이 아시아 사회에서는 전제군주 한 사람만이 자유롭다 했을 때 말하고자 했던 게 바로 이런 문제였다. 역사학자들은 헤겔을 비판하며 전제군주들이 얼마나 많은 권력의 견제를 받았는가를 논증하려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헤겔의 논지를 강화시키고 있다는 걸 몰랐다. 헤겔은 어떻게든 전제군주를 견제하고 그 권력을 제한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반대로 전제군주 홀로 자유롭고 만인이 노예적 상태에 놓여 있다는 걸 증명한다고 했다. 대통령에 얽매여 있는 우리는 그러한 아시아적 특질로부터 얼마나 멀어졌을까? 다시 한번 아시아적 특질에 대해 사유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자유는 사회 위에 군림하는 국가를 사회에 완전히 종속되는 국가로 전환시키는 데 있으며, 오늘날에도 역시 여러가지 국가 형태들이 자유로운지 여부는 ‘국가의 자유’를 얼마나 제한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칼 마르크스, <고타강령비판> 중)

자유기고가 (fpdlakst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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