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정정운운(政政運運)

​정치(政治)는 정치답고 운동(運動)은 운동다워야 한다. 정치를 운동처럼 하고 운동을 정치처럼 하면 이상하지 않은가. 여기서 말하는 정치는 정당을 바탕으로 다양한 시민의 이해관계를 조정함으로써 공동체를 유지하는 제도화가 중심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운동은 사회운동을 의미하며 다양한 시민이 권리 주인으로서 스스로 목소리를 내며 활동하는 주체화가 중심이다.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모든 것을 정치라고 본다면 세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영역이 없다. 만물이 운동하기에 정치도 운동이며 정치개혁‘운동’이나 진보정당‘운동’처럼 정치와 운동을 붙일 수도 있다. 필자를 비롯해 꽤 많은 활동가들이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정당정치와 사회운동을 뒤섞어 '사회운동정당'을 만들자는 주장도 했다. 사회적 역할을 잘하는 노조를 '사회운동노조'라고 부르는 것이야 노조가 사회운동 영역에 속하기에 별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경험할수록 정치는 사회운동과 다른 영역이었다.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폭력을 쓸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국가권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것이 정치라면 사회운동에는 그런 권력이 없다. 정치는 정당이 중심이고 사회운동은 노조나 시민단체가 중심이다. 대의제 민주주의 정치에서 정당은 시민을 대변하고 대표한다. 사회운동에서 시민 결사체는 자기 목소리를 직접 낸다. 정치가 공직 선거라는 체계적인 과정을 통해 선출된 사람에게 권한을 맡기는 ‘대리운전 영역’이라면, 사회운동은 노조 조합원이나 단체 회원의 직접행동이 필요한 ‘자가운전 영역’이다.

묘하게 운동권 닮은 한동훈

대리운전과 자가운전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정치가 운동영역을 침범할 때가 그렇다. 국가가 주도한 새마을운동이나 그 잔재처럼 이어진 바르게살기운동이 그 사례다. 북한에 있었다는 새벽별보기운동이나 천리마운동도 유사하다. 시민사회가 취약하거나 국가권력이 시민사회를 대체한 독재나 전체주의 국가에서 가능했던 일이다. 이때 시민사회는 독립성이 없는 어용단체로 대체된다.

사회운동이 정치를 침범하기도 한다. 시민의 분노가 폭발해 정치를 뒤덮어 버리는 혁명이 가장 강력한 사례다. 정치가 사회를 반영하지 못해 사회운동이 정치를 전복하는 것이 혁명이다. 옳고 그름이나 찬반을 떠나 혁명은 정치의 단절이다. 탄핵촛불에서 시작한 적폐청산운동이 문재인 정부를 뒤덮은 것도 유사하다. 운동권이 정치권으로 변신한 것은 운동이 제도로 흡수된 것이지만, 운동이 정치를 잠식한 측면도 있다.(요즘은 외부에서 정당을 잠식하는 팬덤정치가 더 문제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정치와 운동의 혼돈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그가 ‘운동권 특권정치’를 타깃으로 삼아 정치권으로 옮겨 특권을 누리는 운동권을 비판할 수 있지만, 그것은 불평등과 양극화를 낳은 더 큰 특권 계급을 시야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런데 운동권을 비판하는 그는 묘하게 운동권을 닮았다. 정당정치에서 훈련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왔다는 점도 같지만, 사회운동을 떠나 정치권이 된 운동권 못지않게 사상과 이념에 사로잡혀 적대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는 필자를 비롯해 사회운동에서 쓰던 ‘동료 시민’이라는 단어를 쓴다. 설혹 운동권 출신이더라도 동료라고 부르는 시민에게 적대감을 가지면 이상하지 않은가.

난무하는 정치바라기

누가 정치와 운동을 뒤섞기 시작했을까. 86세대 운동권에도 책임이 있다. 운동경력을 내세워 정치권에 들어가는 사례가 늘면서 ‘운동권은 정치권이 된다’는 관행이 생겼다. 이들의 ‘환승’은 조국이 상징하듯 특권이 돼 한동훈에게도 공격당한다. 상당수 운동권은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주장했지만 36년 지난 지금도 작은 진보정당에 머무는 외로운 ‘독자’ 상태다. 환승이든 독자든 운동권 정치는 사회운동을 독립된 영역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구로 보이게 했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 정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이 아닌 공무원·검찰·법원·의료계가 집단적 정치세력이 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검사독재라는 말까지 나오는 윤석열 정부의 탄생은 검찰의 정치세력화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데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꿈꿔 온 사람들이 검찰의 정치화를 비판하는 것이 온당할까. 노조의 정치세력화를 외칠 때 노조에 교사와 공무원이 포함돼 있다. 그렇다면 검사도 정치세력이 되고, 판사도 정치세력이 되는 것을 잘못이라 말할 수 없다.

이런 마당에 교회도 정치세력이 돼 있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엄청난 학살을 저지른 인류의 뼈저린 경험 끝에 정치와 종교가 거리를 두기로 한 ‘정교분리’ 원칙이 생겼지만, 이제는 그딴 거 가리지 않고 교회도 정치세력화해서 혐오와 적대를 부추긴다. 신도를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집회에 동원해 과격한 선동을 일삼는 일부 교회는 우익정치세력으로 변질했다.

뜻밖에 대한민국이 독보적 1등인 분야가 있다. 2021년 대한민국의 정당원수는 총 1천42만9천여 명으로 인구 대비 20.2%, 유권자 대비 23.6%에 달한다. 인구 대비 2% 내외인 영국이나 일당 체제인 중국의 7.1%에 비해서도 엄청나게 높다. 나치가 지배하던 시절의 독일에서나 가능했을 수준이다.(박상훈, <혐오하는 민주주의> 참고) 쉼 없는 정치세력화 선동과 정치바라기가 난무한 것도 의외의 1등을 만드는 데 한몫했다.

선거철 보내기

양이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최대 비율의 정당원수를 가진 한국 정치 수준이 세계 최고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정당원은 양적으로 늘었지만 '입법공장'이 된 국회는 폐기될 법안을 무더기로 생산하고, 적대와 혐오를 넘어서기보다 부추기는 정치의 질은 엉망이다. 여기에 성장의 시대를 마감한 경제는 저성장에 허우적거리고 ‘국가의 자멸’이라는 출산율 저하를 비롯해 사회의 질까지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진 증거들은 차고 넘친다

기후위기까지 덮쳐 존립이 위험해진 사회(보호)운동이 절박하다. 사회운동의 재구성 없이 자멸하는 국가를 돌이키긴 어려워 보인다. 정치권력 주변에서 독립성을 잃은 시민운동만이 아니라 오매불망 정치에 발 담그려는 노조 안의 정치바라기도 있다. 노조의 위상이 떨어지는 것은 부족한 정치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충분히 못해 ‘노조답지 못한 노조’에 머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바라기들은 노조를 정치에 이용하는 데 관심이 있을 뿐 ‘노조다움’에 집중하지 않는다.

양당 정치는 양극화와 온난화를 해결할 전환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틈새에 낀 진보정당을 보면 짠하다. ‘선거는 민주주의 꽃’이라는 느낌보다 ‘권력을 위한 싸움터’가 됐다. 시민이 주인되는 ‘민주(民主)’는 시민이 양극화와 온난화 해결을 위한 주체로 성숙하는 운동을 통해서 발전할 것 같다. 그렇다고 선거를 피할 수 없다. 두 가지가 있다면 조금 즐겁지 않을까. 첫째는 혐오와 적대를 부추겨 온 정치 양극화를 깨뜨릴 다양성이고, 둘째는 정치바라기를 걸러 내 과열된 정치물을 쫙 빼는 것이다.

환승 정치, 독자 정치, 혹은 3지대 정치에 뛰어든 사람에게 선거철은 ‘몰빵철’이지만 사회운동은 정치바라기처럼 굴지 말고 조금 느긋해도 된다. 어딘가에 숨었다가 희망찬 여의주를 불쑥 물어다 줄 청룡은 없다. 있다면 곁의 시민이다. 계절이 요란하다고 덩달아 과몰입하지 말고 적당히 즐기자. 설혹 정치가 정치답지 못해도 대리기사 뽑는 선거철 지나 사회(보호)를 위한 자가운전을 계속해야 할 테니.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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