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 3년여 만에 재야에 첫 대화를 요구했다. 2021년 2월 쿠데타로 수치 여사의 합법 정부를 무너뜨린 군부 최고사령관이 지난 4일 “국민의 삶을 고려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자”고 말했다.

소수민족 중심의 무장 반군이 미얀마 북부 여러 주에서 군부 기지와 주둔지 300여곳을 탈환하는 바람에 전세가 역전되자 나온 궁여지책이다. 외신은 군부가 패색이 짙어지자 출구전략을 내놨다고 평가했다. 국제사회는 휴전과 대화를 촉구했지만, 군부는 2년 넘게 막무가내였다. 외신은 이번 유화책도 군부의 이중 플레이라고 혹평했다.(한국일보 12월7일 12면, 미얀마 군부 “대화로 풀자” 3년 만에 첫 유화책)

그런데 미얀마 군부를 궁지에 빠뜨린 무장 반군은 숨어서 미국에 기대어 성명서만 발표하는 민주진영 임시정부도, 나라 밖으로 달아난 망명 정치인도 아니다. 2015년 집권한 수치 정권은 미얀마 소수민족인 로힝야족 학살에 어떤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때문에 수치가 받은 노벨평화상 취소 여론까지 거셌다. 보다 못한 노벨재단도 수치의 행보에 유감까지 표명했다.

미얀마에는 샨·카렌·몬·카미·로힝야·카친·아라칸 등 수십 개의 소수민족이 산다. 미얀마족도 미얀마에 사는 여러 민족 중 하나일 뿐이다. 미얀마 비극의 역사는 뿌리 깊다. 제임스 스콧 예일대 교수는 중세 때부터 동남아를 다스린 왕조는 한결같이 소수민족을 학살했다는 데 주목해 동남아 산악지대의 소수민족 역사를 집중 연구했다. 스콧은 연구를 집대성해 2009년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을 펴냈다.

조미아(Zomia)는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태국·미얀마, 중국 윈난·구이저우·광시·쓰촨성을 가로지른다. 인도 동북부까지 9개 나라 변방에 걸친 해발 300미터 이상 고지대로 250만킬로미터의 넓은 땅이다. 조미아는 이 지역 소수민족 언어 ‘동떨어졌다’는 뜻의 ‘조(Zo)’와 사람을 뜻하는 ‘미(Mi)’의 합성어다. 여기엔 아직도 국민국가에 편입되길 거부하는 1억명이 산다. 조미아는 국가의 지배로부터 벗어난(도망친) 사람들의 ‘피난지’다. 그들은 세금과 징집·기근·전염병이 범람하는 국가권력을 피해 산으로 갔다.

영국 명문 사립 이튼학교를 졸업한 조지 오웰은 뻔히 정해진 옥스퍼드를 버리고 1922년 엉뚱하게도 미얀마로 갔다. 오웰은 미얀마에서 5년간 식민지 본국의 ‘제국경찰’로 일했다. 돌아온 오웰은 양심의 가책 때문에 2년간 런던과 파리에서 노숙인으로 지냈다. 오웰은 ‘미얀마 시절’과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출판해 참회했다.

오웰의 미얀마 시절 20년 뒤 동남아를 점령한 일본군은 태국에서 미얀마로 넘어가는 415킬로미터에 걸친 철도를 놨다. 일본 제국주의는 밀림과 산악을 가로지르는 철로공사에 전쟁 포로와 조미아 주민, 조선인 등 20만명을 강제 동원했다. 최대 난공사는 ‘콰이강의 다리’였다. 여기서 영화 <콰이강의 다리>가 나왔다. 콜레라와 말라리아가 번져 4만명을 앗아간 죽음의 철도였다.

수치의 아버지 아웅산은 미얀마 국부로 추앙받는다. 젊은 독립운동가 아웅산은 미얀마를 지배하던 영국에 저항하다가 1940년 일본에 망명했다. 아웅산은 태평양전쟁 때 일본 제국주의 도움으로 귀국해 영국군과 싸웠다. 일본은 아웅산을 앞세워 미얀마 괴뢰정부를 세운 뒤 영국보다 더 가혹하게 통치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자 영국이 미얀마를 다시 점령했다. 아웅산은 1947년 1월 영국 총리와 협정을 맺고 독립 기반을 마련했지만 그해 7월 19일 한 무리의 군인들에게 암살됐다. 아웅산 암살로 미얀마의 비극은 더해졌다. 군부의 잦은 쿠데타에 시달리고 소수민족과 공존하려는 의지도 없는 대책 없는 나라가 됐다. 버마족이지만 소수민족에 관대했던 아웅산이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공교롭게도 아웅산은 여운형과 같은 날 암살됐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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