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진미 영화평론가

거대한 백래시가 몰아치고 있다. 하반기를 뜨겁게 달군 전청조 관련 뉴스는 퀴어에 관한 혐오 게이지를 올려놓았다. 지난여름 퀴어 퍼레이드는 서울광장에서 열리지 못했다. 코로나 팬데믹 초기의 이태원 클럽발 확진자 검출은 사람들의 뇌리에 혐오를 깊이 각인시켰다. 반동의 물결은 퀴어에 국한되지 않는다. 온라인에선 집게손가락 생트집으로 여성노동자를 향한 집단 괴롭힘이 일어났다. 언제든지 페미니즘 사상검열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다는 겁박이 횡행하는 사회다. 오프라인에서는 젠더 폭력의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급기야 편의점에서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여성을 향한 혐오범죄가 일어났다. 여성가족부 해체를 공약으로 내건 정부에서 벌어지는 일상이다.

이런 시기에 반가운 영화 <홈그라운드>가 개봉했다. <홈그라운드>는 2022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신진 감독상과 관객상을 수상한 퀴어 다큐멘터리다. 영화를 찍은 권아람 감독은 장편 데뷔작 <2의 증명>(2013)으로 트렌스젠더 성별 정정 과정을 보여준 여성감독이다.

1. 유쾌한 ‘명우형’과 그 시절 샤넬다방

“이모라고 부르지 마. 나 명우형이야.” 영화를 열어젖히는 유쾌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전설의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를 운영하는 60대 윤김명우다. 영화는 윤김명우를 중심으로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와 1970년대 서울 명동 ‘샤넬다방’의 기억을 재구성한다.

윤김명우는 1956년생이다. 청소년기에 여자를 좋아하는 문제로 방황하던 그는 사복을 입고 찾은 명동의 ‘샤넬다방’에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1970년대 명동은 연예인·예술가 등이 모여들던 유흥가였고, 유네스코 뒷골목은 레즈비언들의 집결지였다. 그중에서도 ‘샤넬다방’은 한국 최초의 여성 전용 바였다. 1974년 문을 연 음악다방으로, 업소 주인은 이성애자 남성이었지만 DJ는 여성이었다. 맞춤 슈트로 남장을 한 ‘바지씨’와 ‘치마씨’가 모여들어 호감을 주고받았다. 20대, 30대, 40대, 연령층도 다양했다. 하지만 ‘샤넬다방’은 퇴폐업소로 낙인찍혀 단속당하고 1976년 결국 폐업된다. 당시 신문에는 손님 124명이 연행된 기사와 고개 숙인 여자들의 사진이 실렸다. 해방구를 잃은 사람들은 흩어졌다. ‘명우형’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레즈비언들이 마음 편히 만나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의 중요성을 체험한 그는 나중에 ‘레스보스’의 ‘섬지기’가 된다.

2. 레즈비언들의 성지, 레스보스

한국에서 퀴어 운동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때를 보통 1990년대로 잡는다. 지난 세대의 퀴어 운동은 게이 커뮤니티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지고, 레즈비언들은 비가시화됐다. 이제 레즈비언을 중심으로 퀴어의 기록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1994년 11월 여성 동성애자인권모임 ‘끼리끼리’가 만들어졌다. 1996년 8월에는 SBS에서 ‘송지나의 취재파일-세상속으로’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레즈비언’편이 방영되면서 레즈비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끼리끼리’ 회원수는 2년 만에 200명으로 급증했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96년 5월 최초의 레즈비언 바인 ‘레스보스’가 서울 공덕동에 작게 문을 열었다. ‘끼리끼리’ 회원의 엄마가 운영하던 카페를 여성 전용 바로 탈바꿈해 개업한 것인데 이후 신촌으로 확장 이전했고, 2000년대 초에 홍대로 이전했다.

윤김명우는 원래 ‘레스보스’에 손님으로 다니다가 40대 중반이던 2000년께에 ‘3대 섬지기’가 됐다. 일식 요리사였던 그는 퀴어들의 선배로 모범이 되고자 방송에 얼굴을 드러내며 커밍아웃하고, 인권운동에 앞장선다. 윤김명우가 있던 때가 ‘레스보스’의 황금기였다. 당시 ‘레스보스’는 2시간을 대기해야 들어갈 수 있는 ‘핫플’이자 성소수자 고민상담소였다. 하지만 레스보스는 2009년에 문을 닫았다. 이후 윤김명우는 강남에서 2014년에서 2018년까지 ‘명우형’이라는 레즈비언 와인바를 운영했다. 그곳에서 직접 말린 나물 반찬을 서비스 안주로 내주었는데, 권아람 감독이 그를 처음 접하고 다큐멘터리를 구상한 것이 이맘때라 한다.

이후 윤김명우는 ‘레스보스’가 이대로 없어져선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2019년 12월 이태원에 재오픈했다. 하지만 아뿔싸! 시기가 최악이었다. 바로 그때 코로나19가 터졌고, 하필이면 이태원 클럽에서 확진자가 나오면서 전 국민적인 혐오 여론이 들끓었다. 영화에는 ‘명우형’이 빈 가게를 지키며 경영난에 고심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대료와 대출이자를 벌기 위해 남의 가게에서 투잡, 쓰리잡을 뛰고 빌라 반지하를 드나드는 초로의 윤김명우. 하지만 그 와중에도 변희수 하사를 추모하고 퀴어의 새로운 개념을 공부한다며 호쾌하게 웃는다. 팬데믹이 지나갔으니, 경영난은 이제 좀 나아졌으려나? 잇달아 이태원 참사가 터진 걸 알지 않는가.

3. 신촌공원, 루땐, 그리고 어디에나

영화는 ‘샤넬다방’과 ‘레스보스’를 거쳐 신촌공원으로 눈길을 돌린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레스보스’를 찾는 청소년들도 있었다. ‘명우형’은 구청 위생과에 문의해 술 담배를 팔지 말고 음료와 음식만 팔고 이른 시간에 출입시키면 된다고 해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청소년들은 업소보다 자연스럽게 공원에 모여들었다. 당시 신촌공원에서 10대 레즈비언들이 모여 이벤트를 열고 아이돌 춤을 따라 추며 놀곤 했다. 그래서 ‘레즈 공원’이라며 조롱당하기도 했다. 당사자들의 기억에만 남았을 뿐 기록이 있을 리 없다. 영화는 ‘샤넬다방’ 장면과 마찬가지로 재연을 통해 이 장면을 구성한다.

영화는 2018년 ‘루땐’으로 시공간을 확장해 간다. ‘루땐’은 루시아가 운영하는 망원동의 퀴어 페미니스트 댄스 공간이다. 퀴어들이 마음 놓고 자신의 몸의 움직임을 느끼며 향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또 하나의 해방구다. 영화에는 루시아가 존경의 의미로 ‘명우형’에게 자주 꽃을 보내는 장면이 담겨 있다. 퀴어들의 공간을 지키는 이들이 세대를 넘어 연대하는 모습이 빙그레 웃음 짓게 만든다.

영화는 1970년대 이후 한국 레즈비언 교류의 문화사를 아카이빙한 기록이자, 세대 간 연대를 볼 수 있는 작업으로 각별한 가치를 지닌다. 한 세대 전에도 퀴어들은 있었고, 90년대 이전에도 퀴어들은 있었다. 아니 퀴어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도 ‘바지씨’라는 이름으로 있었고, 그 이전에도 있었다. 그리고 어디에나 있다. 당신이 한사코 알려 하지 않기 때문에, 드러내지 못할 뿐이다.

영화평론가 (chingm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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