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여울 공인노무사(노노모)

친한 동기의 퇴사를 축하하며 술 한 잔 기울이던 어느 저녁,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열었다가 보게 된 부고 메시지. 나도 모르게 ‘헉’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놀란 나를 보며 동기들은 무슨 일이냐는 눈빛을 보냈고, 나는 그들에게 대답했다.

‘김민아 노무사님 돌아가셨대…’

처음 노무사님을 뵀던 게 언제였을까?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나의 기억으로는 2017~2018년쯤 국회 토론회다. 노무사님은 토론회 참석자들에게 책자를 나눠주고 계셨는데, 많은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에서 어딘지 모르게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책자를 건네받으며 ‘안녕하세요, 노무사님 저 노노모 후배예요’라고 인사드렸더니 순식간에 노무사님의 눈이 반달로 변했다. ‘그렇구나, 우리 다음에 또 봐요. 자주 봐요’라고 대답해주셨다. 별다른 접점이 없던 노무사님과 나는 그 이후로 자주 보지 못했고, 이따금 노노모 행사에서 마주칠 때 인사 정도 나눌 뿐이었다.

노무사님은 모르셨겠지만, 사실 나는 노무사님의 행보를 동경하고 응원하고 있었다. 여성이나 퀴어·인권 등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찾아볼 때면 심심치 않게 노무사님의 활동기록이나 인터뷰를 접했기 때문이다. 노무사님만의 에너지와 행동력이 멋지고 부러워서, 노무사님이 제작하시는 늘봄 뉴스레터도 구독하고, 굿즈도 구매해서 사무실에 붙여놓기도 했었다. ‘다음에 만나면 노무사님과 더 많이 야야기 나눠야지’라는 이제는 아무런 의미 없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암이 재발했다고 했을 때,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럼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실 때, 사실 그 언제라도 내 마음을 전할 기회는 많았는데, 그러지 않은 것이 아주 많이 후회된다.

부고를 받은 다음날 찾아간 장례식장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지금껏 가본 장례식장 중 사람이 가장 많은 장례식장이었다. 즐겁고 축제 같은 분위기의 장례식은 다 가식이라고, 장례식은 슬퍼야 한다던 노무사님의 말처럼 노무사님의 장례식은 참 슬펐고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조객록을 쓰고 상주와 목례한 뒤, 사진 속 노무사님에게 나는 이야기했다. ‘노무사님 저 사실 노무사님이랑 친해지고 싶었어요. 일찍 얘기 못 드려서, 연락 한 번 못 드려서 죄송해요.’라고. 어쩐지 노무사님은 처음 봤을 때 보여주신 그 반달눈으로 나에게 ‘와줘서 고마워요’라고 말했을 것 같다.

장례식장을 다녀오고 며칠 뒤, 미등록 이주노동자 농성투쟁을 기록한 전시회인 ‘존재선언’에 다녀왔다. 이 전시회의 포스터와 로고를 김민아 노무사님이 그렸다고 한다. 정말 다재다능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다시 한번 느낀다. 노무사님으로 인해 힘을 얻었을 많은 노동자들이, 노무사님과 절친했던 혹은 친하고 싶었던 많은 친구와 동료들이 노무사님을 오래도록 그리워하고 기억할 것이다. 이제 노무사님께서는 한없이 평안하고 행복한 단잠에 드시기를, 그 꿈속에서는 한 줌의 아픔도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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