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은희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단테는 지옥의 문밖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에 대해 묻는 단테에게, 지옥의 길을 안내해주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치욕도 명예도 없이 살았던 슬픈 영혼들이 이 비참한 길을 간다. 그들은 신에게 충성하지도 반항하지도 않고 거리를 두었던 비겁의 천사들과 이제 함께한다. 천국은 그 아름다움에 누가 될까 그들을 쫓아냈다. 깊은 지옥도, 죄인들이 그들을 보고 영광을 얻을 수 없도록, 그들을 들여보내기를 거부했다(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편> 제3악장).”

‘지옥의 가장 암울한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는 격언은 사실 저 장면에서 파생된 말이다. 다만 이 격언은 부정확하다. 중립을 지킨 자들의 자리는 지옥의 가장 밑바닥도, 심지어 지옥도 아니다. 단지 지옥의 곁,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일 뿐이다.

지옥의 곁에서만 머물게 된 것은 적극적인 해를 가한 것과 수동적인 ‘중립’을 동일하게 대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리라. 하지만 동시에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는 것 또한 선택이다. 과거를 지속하기로 하는 것, 변화를 꾀하지 않기로 하는 것 모두 선택이다. 그 수동적인 선택은 때로는 적극적인 해악보다 더 해롭다.

내년 1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은 시행 2년이 된다. 2년이면 사건을 조사하고, 책임자를 기소하고, 그에 대한 판결이 내려질 수 있는 시간이다. 법의 적용 모습을 가늠할 수 있는 시간이다.

11월 21일까지 총 11건의 중대재해처벌법 1심 판결이 있었다. 11건의 판결, 모두 유죄였지만 그중 1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중대재해처벌법은 노동자의 죽음에 더 중한 책임을 묻고자 제정됐다. 법은 바뀌었지만 법원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하한형이 징역 1년 이상인 범죄에 집행유예가 끝없이 선고된다. 최대 10억원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지만 11건의 선고 중 1억원이 넘는 벌금형이 선고된 적은 없다.

법원의 판시 내용을 보면 중대재해처벌법의 제정 의의와 그 중요성을 설시해 마치 정의를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법원의 근엄한 어조가 무색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판결의 집행유예 일색에서 벗어나지 못한 선고는 기업에게 속삭이듯 법원의 속뜻을 전한다, ‘죽여도 괜찮다.’

주로 몇 천만원의 벌금형에 그치는 법원의 판결, 그 힘의 균형에 있어 너무나도 바닥에 있는 노동자의 잘못도 고려한다 말하며 마치 중용을 지킨다고 착각하는 법원의 판결은 정의를 말하지만, 사실은 기업의 계산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미비한 정의를 전한다.

이런 상황에서 내년부터 있을 중대재해처벌법의 5명 이상, 50명(억) 미만 사업장의 적용 확대가 ‘중소기업의 대표자의 구속과 해당 기업의 폐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중소기업중앙회의 걱정은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시나리오에 대한 기우에 불과하다.

노동자의 죽음이 계속되는 것에는 죄에 대한 적절한 책임을 묻지 않는 법원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춥다. 관측 이래 가장 따뜻한 겨울이라는 통계의 스산함 때문인지, 누군가의 죽음에도 기업에 대한 걱정이 먼저인 기사들의 무신경함 때문인지 몰라도 도무지 춥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은 겨울이 예년보다 더 춥다.

유난히 춥게만 느껴지는 이번 겨울에, 법은 바뀌었지만 여전한 법원에게, 지옥의 곁에서 따뜻한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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