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경아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

과로나 스트레스로 인한 산재 상담을 하다 보면 업무부담에 관한 설명이 마음을 무겁게 하지만, 정작 옅은 탄식이 나오는 지점은 따로 있다. 고혈압이나 당뇨와 같은 만성질환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가 그렇다. 업무부담이 발병이나 질병의 악화에 미친 영향이 어떤지에 집중할 사안인데도, 개인이 가진 기저질환이 원인으로 보인다는 취지로 업무관련성이 부정돼 지난한 다툼의 수렁으로 빠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탓이다.

애초에 과로가 문제가 될 정도로 과중한 업무를 수행해 온 노동자들은 고혈압이나 당뇨 등 만성질환도 패키지 상품처럼 함께 견뎌 온 경우가 많다. 스스로를 돌보기 어려운 고된 업무 일정 속에서는 만성질환이 발생하기 쉽고 관리는 더더욱 녹록지 않은 나날을 보내기 때문이다. 나아가 당장 고혈압만 봐도 너무나 흔한 만성질환이다. 대한고혈압학회의 올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3명 중 1명은 고혈압에 해당한다. 고혈압과 같은 기존 만성질환을 업무관련성 부정의 중요 근거로 삼는 것은 상당수 노동자를 산재보험 적용범위에서 대거 탈락시키는 셈이어서 부당하다.

대법원도 업무관련성을 평가할 때에 ‘보통 평균인’이 아니라 ‘해당 노동자’의 건강과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업무가 상병에 미친 영향을 판단해야 한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고용노동부도 이를 적극 반영하는 동시에 제도의 취지를 고려해 고시를 개정하는 방향으로 힘을 실어준 바 있다. 고혈압과 같은 기초질환을 업무관련성 판단의 중요 요소로 보기 어렵다는 점을 명시하면서, 기존의 ‘건강상태’를 고려사항에서 제외한 것이다.

문제는 고시 개정에도 불구하고 기존 건강상태를 업무관련성을 부정하는 주요 요인으로 삼는 경향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법원이 재차, 업무상 재해 인정에 지나치게 엄격했다는 ‘반성적 고려’에 따라 고시를 개정한 것임을 확인하고, 개정이유에서도 재해자의 기초 질환만으로 업무관련성을 부인하지 않는 법원의 경향을 고시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 사정을 언급하며, 노동자가 고혈압을 관리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업무관련성을 부인한 사안은 개정된 고시의 취지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것이어서 ‘위법하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지적한 사례가 있을 정도로 여전히 개선이 필요한 지점이다.

업무에 수반되는 부담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고 재해노동자들의 재활과 사회 복귀를 촉진하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만성질환을 피하지 못한 혹은 묵묵히 견뎌온 노동자들만큼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다퉈지는 일이 아직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러나 산재보험 제도는 가입 당시부터 건강상태를 확인해 보장범위를 정하는 민간보험과는 달리, 노동자라면 모두가 가입하는 사회보장제도 중 하나다. 무엇보다 ‘완벽하게 건강한 상태의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이미 상병이 인지되고 그간 수행해 온 업무 부담 자체로서 상병에 영향을 미칠 요인들이 확인되는 경우라면, 해당 노동자의 출발점이 완벽하게 건강한 상태였는지를 재차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업무관련성을 인정하는 것이 제도의 취지나 기능에 더욱 부합하지 않을까. ‘완벽하게 건강한 자’만을 가려내어 가입 및 보험료 징수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추신)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려면 근로복지공단의 여건과 기반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재정상 한계도 물론 있겠지만, 적용범위 확장에 따라 사건수와 범위도 늘어나는데 담당 인력은 부족하니 사건마다 들일 수 있는 여력과 시간이 반비례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현실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과중한 업무와 감정노동으로 근로복지공단 직원이 투신해 숨지신 일도 이러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올해 근로복지공단측은 정부에 최소 1천100명은 더 필요하다고 증원을 요청했다는데 정작 내년도 인력 증원은 8명뿐이라고 하니 고충은 한동안 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를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을 펼칠 수 있는 여건 역시 관심을 가지고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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