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 조건준 아유 대표

그깟 손가락 그림

그 손가락 모양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주변에 꽤 많다. 이들은 11월26일 게임업계에서 시작된 손가락 논란도 모른다. 그런데 관련 게임업체 이해관계자와 페미 논쟁에 예민한 사람들은 그것이 지금 세계의 전부인 것처럼 격하다. “관심 없다”며 손가락을 둘러싼 호들갑을 단번에 패대기치는 쿨한 이도 적지 않다.​

남성을 조롱한 여성이 사용한 손가락 모양은 취하기 쉬운 동작이다. 인터넷을 뒤져 보면 그림자놀이, 광고, 사물을 집는 그림, 크기를 표현한 동작을 찍은 사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누구든 그런 모양을 취할 수 있고 어디에서든 그런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 이거 혐오 아니냐고 시비를 붙고 싶다면 먹잇감은 널려 있다.

이번 손가락 논란을 일으킨 그림을 그린 이는 여성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남성으로 밝혀졌다는 보도에도 꼬리를 물고 또 누군가를 공격하는 일이 이어진다. 성찰은 단 1도 허용하지 않는 혐오 감정에 휩싸이면 인지부조화와 확증편향으로 똘똘 뭉쳐 씩씩거릴 수밖에 없을까. 손가락 논란을 게임처럼 즐기는 이들이 있는 걸까.

약해진 마음 근육​

다양한 산업의 노동자를 만나 “이 업계 사람들 마음 근육은 어떤가요”라고 물으면, 마음 근육이 뭐냐는 질문이 되돌아온다. 함께 있던 어떤 이는 “멘털”이라고 했다. 딱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마음은 이성과 감성, 생각과 감각의 통합이다.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리며 약해지거나 비바람에 뽑히지 않는 것처럼 강해질 수도 있다. 이런 마음 속성을 근육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 마음 근육이다.

세상의 압력에 상처받은 마음 근육은 약해진다. 그래서 정신과 치료나 심리상담은 물론 혐오가 늘고 있다. 마음 근육이 약해지면 외부 자극에 쉽게 무너질 수 있기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손가락 그림을 보고 여성의 의도적 행위로 단정하고 공격을 퍼붓는 유저들 마음 근육은 어떨까. 자존감 꽉 찬 탄탄한 마음 근육이 있다면 이토록 거칠게 달려들까.

가부장제라는 단어를 몰랐던 시절, 남성을 과시하던 사내들이 자랑하던 ‘성관계 경험’은 ‘강간 무용담’에 가까웠다. 그들은 욕망에 사로잡힌 나약한 수컷이었고 자기 여자에게는 순결을 요구하는 정신분열적 수컷이었다. 연애력 1도 없다. 옛 얘기가 아니다. 여자를 넘어뜨리는 장소가 들판에서 모텔로, ‘저항하면 소문을 내겠다’던 협박이 ‘대들면 뿌리겠다’는 섹스 동영상으로 바뀌었을 뿐 아직도 강간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약한 마음 근육에서 나오는 성폭력과 혐오는 별로 다르지 않다. 자위로 욕망을 잠재울 수 있을까. 온라인 게임에 헐벗은 왕가슴 캐릭터를 등장시켜 얼마나 욕망을 채울지 모르지만, 미숙상태(커밍업쇼트)로 교감하고 공감하는 섹스를 기대할 수 없다. 여성을 주체로 인정하지 못하고 소유와 지배 욕망만 남은 연약한 마음 근육을 가진 남성은 우월감으로 ‘보호자’를 자처하거나 열등감으로 ‘파괴자’가 된다.

게임산업에 떠도는 공포

어떤 게임프로그램 개발자는 게임업계를 ‘폐쇄 산업계’라고 했다. 게임을 만들고 플랫폼을 운영하는 기업, 이직해도 게임 기업을 순환하는 개발자, 커뮤니티를 만들어 영향을 행사하는 유저, 게임전문 언론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이런 게임산업에서 혐오 논란이 반복된다.

게임업계 노조는 이런 이슈에 어떻게 반응할까. 이 사건 이전에 만난 관계자들은 신중했다. 게임 유저들이 강력한 고객이고, 유저들에게 찍히면 기업이 망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기업이 살아야 노조가 산다’는 오래된 이데올로기가 또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느낌이다. 기업이 망한다는 것은 지나친 걱정이 아닐까. 유저의 공격을 받고 게임을 만든 업체가 망한 사례가 있다며 논란에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

게임산업 대기업이 유저들 공격에 허둥지둥 사과하고 하청업체는 원청에 눌려 나중에 겨우 사실을 밝힐 수 있는 게임업계 모습에 공포가 보인다. 공포에 휩싸이면 올바름은 중요하지 않으며 생존을 위한 출구를 향해 질주하는 ‘터널시야’에 갇힌다. 권리를 위한 결사체인 노조는 여성권의 편에 서야 할 것 같지만, “우리도 살아야죠”라던 관계자 반응은 게임업계에 작동하는 심리를 솔직히 보여줬다.

공포가 혐오를 키운다

​공포는 전염된다. 강자는 지위를 잃을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에 저항하는 약자를 과격하게 진압한다. 약자는 일상에서 공포를 느끼지만 과격한 진압에 상처를 입는다. 모두들 남녀는 대립할 존재가 아니라지만 서로를 향한 혐오가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성을 향한 혐오든 그 이면에는 두려움이 깔려있다.

게임산업 논란에 최초로 방아쇠를 당긴 것이 선정적으로 그려서 최대한 벗겨 놓은 여성 캐릭터를 판매하고 소비해 온 게임업계든, 과격하게 달려든 메갈리안이든, 사상검증에 집착하는 남성 유저든, 공포는 게임산업에 번져 있다. 공포는 게임업계를 넘어 다른 산업의 기업을 공격했고 이번에도 다른 기업으로 번졌다.

남초 커뮤니티 유저들은 손가락 모양이 남혐과 무관한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그것을 페미 여성이 아닌 남성이 그린 것인지, 팩트에 별 관심이 없다. 자신들의 행위가 사회에 미치는 의미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는 분석이 있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요란한 반응을 보며 자신들의 효능감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이런 분석이 맞다면, 손가락 논쟁 확산은 위험하다. 혐오를 즐기는 사람의 효능감을 키워 주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격에 호들갑을 떠는 기업은 물론 올바름으로 그들에게 맞서 정의를 실천하려는 시민단체마저 혐오게임에 에너지를 주는 숙주가 된다. 공포가 혐오하는 자들의 혐오를 만들었다면, 혐오 대상의 공포는 그들의 혐오를 키운다.​

손가락 논란을 끝낼 수 있을까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집단 괴롭힘인 ‘사이버불링’은 공포를 유발한다. 공포를 목적으로 한 행위가 테러다. 테러에 대응하는 원칙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은 '테러와의 전쟁' 같은 호들갑이 아니다. 테러가 노리는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손가락 논란을 극복하는 방법도 놀라서 난리를 떠는 것이 아닌 ‘무시’ 혹은 ‘무뎌지는 것’이다.

무시는 “그딴 논란에 관심 없다”고 쿨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보여준다. 당장 매출이 떨어지는 기업이나 사상검증으로 불이익이 다가온 당사자에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절제된 조치를 취하면서 논란을 통제해야 한다. 무뎌지게 하는 것은 손가락 모양을 여기저기에서 마구 사용해 논란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무뎌지게 하려면 많은 사람의 참여가 필요하다. 어설프면 혐오게임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

두려움이란 정확히 모르는 위험에 대한 감지와 그것을 넘어설 수 없는 무기력이 결합된 감정이라고 한다. 손가락을 둘러싼 공포는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는가. 공포는 어떻게 게임업계와 다른 산업으로 전염되고 있는가를 안다면 극복 방법도 찾을 것이다. 손가락 논란을 보면 상호존중을 향한 성숙이 아니라 공포에 휩쓸려 혐오와 갈등의 덫에 허우적거리며 퇴화하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혐오보다 따스한 기부’ 운동을 벌이는 유저들도 있다. 서로 마음 근육을 살피자.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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