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배워 역사전문가처럼 활약하다가 여러 논란 끝에 시들해진 설아무개 스타강사. 그가 한창 잘나가던 때에 내가 일하던 신문사에서 그에게 강연을 요청하니 “저, 한 시간에 2천만원 이하론 안 되는 거 아시죠?”라고 말했단다. 속으로 ‘이 사람 돈독이 올랐군’하며 접었다고 한다.

그가 TV에 나오면 늘 불안했다. 역사 속 사건은 대부분 복잡한 여러 원인에서 출발하는데, 너무 단순화시켜 위험했다. 입시학원 일타강사 출신인 그에겐 단순화가 큰 무기였으리라. TV 매체도 복잡한 걸 싫어한다. 그래서 TV는 바보상자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그는 우리 입시제도와 TV 매체에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건 그보다는 방송사 PD와 미친 팬덤 문화 탓이다.

2020년 말 디스패치가 그의 석사 논문을 카피킬러로 분석하니 52%가 표절이라고 보도했다. 인문사회과학에선 아무리 넉넉하게 허용해도 15%가 넘으면 표절이다. 그도 “논문을 작성하면서 연구를 게을리하고 다른 논문들을 참고하는 과정에서 인용과 각주 표기를 소홀히” 했다고 인정했다. 대학원은 그의 석사 학위를 취소했다. 그가 지난해 9월 같은 대학원에 다시 입학해 열심히 공부 중이라니 천만다행이다. 나도 석 달 만에 급히 석사 논문을 쓰면서 수많은 논문을 참고했지만 카피킬러에 돌려보니 표절률 2%였다.

나는 늘 그와 방송인 최태성씨를 비교했다. 두 사람 이력만 보면 누가 전문가인지 단박에 보인다. 두 사람은 이투스와 메가스터디·EBS 강사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다른 이력은 확연히 차이 난다. 설씨는 유엔세계식량계획 명예 홍보대사와 국방부 5기 국민소통전문가단 같은 이력을 지닌 반면 최씨는 20년간 고교 교사를 지냈고 EBS와 국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모의고사 출제위원을 지냈다.

<역사저널 그날>과 <벌거벗은 한국사>에 나오는 방송인 최태성씨는 몸짓과 말솜씨는 설씨만 못하지만 내공이 돋보인다. 모쪼록 그가 방송이 만든 허명에 들떠 자신의 전문성을 잃지 말았으면 한다.

2015년쯤 서울시 노동정책과 청년노동팀장은 정년을 바라보는 50대 후반이었다. 아마도 9급부터 시작해 사무관을 달았으니 열심히 살아온 셈이다. 당시 박원순 시장이 워낙 청년노동자에게 관심이 많아 주무팀장인 그는 압박감이 심했다. 그가 평생 공직자로 살면서 말년에 이런 일을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듯했다. 그럼에도 그는 무척 노력했다.

하루는 시청에 들어가 그와 업무협의를 하다가 우연히 노동연구자 김종진 박사 얘기가 나왔다. 박 시장이 팀장에게 서울지역 청년노동자 관련 통계를 꿰차고 있는 김 박사 얘길 몇 번 했던 모양이었다. 나도 민주노총 근무 때 그에게 수없이 자문을 구하고 연구과제를 부탁했다. 시청 팀장에게 김 박사 연락처를 주고 전화로 미리 언질을 줬더니, 그 팀장은 “귀인과 연결해줘 감사하다”고 연신 사례했다.

노동계에선 강연하면 하종강·김진숙 두 사람을 ‘전국구 스타강사’로 부른다. 두 사람이 오래 버티는 이유는 스타성에 기반한 팬덤 문화가 아닌 ‘진정성’이다. 연구자 김 박사도 그렇다.

며칠 전 함께 일하는 사람이 김 박사를 초청하는 강연을 잡았다며 “이제는 하종강 선생처럼 전국구 강사”라고 소개했다. 김 박사가 과연 좋아할까. 내가 아는 그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다. 김종진을 하종강·김진숙처럼 오래 노동자 곁에 머물며 더 깊이 있는 연구자로 만들려면 제발 노동계 활동가들이 자중하고 또 자중해야 한다. 팬덤은 청중도 망치지만 화자(話者)도 망친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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