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매일노동뉴스> 칼럼 중 ‘홍명교의 가까이 또는 멀리’를 다시 한번 읽다 문득 깨달았다. 이 글도 나처럼 4주 간격이잖아!

운 좋게 지면을 얻으며 감사한 경험이 많았다. 활자의 힘을 실감했다. 보람도 있지만 그만큼 버거워졌다. 그래서 4주보다 길게 마감 간격을 늘려 달라 몇 번 읍소했으나 매번 교섭에 실패했다. 편집국장님은 1~2주 간격으로 쓰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며 “절대 불가”라고 했다. 근데 지금 보니 4주 간격 기고자가 제법 있다. 뭔가 묘하게 속은 느낌이다.

혹시 나는 노조를 경험하지 못해 교섭에 매번 실패할까. 일상의 사소한 교섭도 주로 패배하는 이유는 순전히 개인의 특성일까. 나는 언변이 부족하다. 강의부터 발표, 가벼운 회의라도 입을 떼려면 몇 차례 연습한다. 그래도 마음만 급하고 감정만 앞서 글로 다 써 놓은 이야기도 입으로 내뱉는 순간 두서가 없다. 혹시 노조에서 실제 교섭을 익혔으면 좀 나아졌을까 가끔 궁금하다.

사실 나처럼 책으로 노조를 배운 이들이 적지 않다. 노동조직이 사회의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하는 현실 공간이라는 점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노동운동의 관념적 이상과 규범에 압도돼, 정작 실제 구성원과 조직을 마주하면 쉽게 혐오를 보이기도 한다.

노조가 민주주의의 학교라는 의미는 거창한 뜻이 아니다. 노조 리더 중에는 불의를 참지 못해 정의롭고 동료를 잘 돕는 이들도 많지만, 정도 이상 공명심을 품는 사람도 있다. ‘프로불편러’라 다른 활동가조차 불편하게 만드는 간부도 있다. 조합원은 더 다양하다. 조직활동을 묵묵히 돕는 사람부터, 말만 앞세우는 이들, 자기 욕심만 앞세우는 이기적인 사람까지 다양하다. 노조활동을 하며 배우고 익히는 것은 단순히 노동법이나 교섭 기술만 아니라 사람에 대해 배우는 것 같다. 온갖 인간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 천태만상 사람들이 ‘우리’가 돼 공통분모를 찾고 의견을 집약하는 방법, 그 안에서 동료애·동지애를 쌓으면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리더’와 간부를 발굴하는 안목 등.

사측과 운영진을 만나 협상하는 방식도 실제로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조직 규모가 작고 노조와 교섭 경험이 없는 사용자일수록 기본 노동법 지식이 없고 태도도 전근대적인 경우가 많다. 반면 큰 조직의 사용자는 전문성도 노하우도 쌓여 긍정적 의미든 부정적 의미든 프로들이 많다. 사용자 성격과 상황에 따라 거세게 저항하며 협상력을 키워야 하는 순간도 있지만, 조용히 뒤에서 협상을 진행하는 편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구체적인 현장 상황과 시기에 따라 조직과 당사자들의 경험이 축적하며 답을 찾을 수 있을 뿐 처음부터 정해진 답이 있지는 않다.

아쉽게도 나는 경험이 없고 내 주변, 내가 관찰한 먹물들 상당수도 별반 다르지 않다. 노조 일반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자기가 속한 연구원·대학·정당 등 자신이 일하는 공간의 문제점을 제기하거나 차별을 개선하는 데는 무지하거나 무능하다. 아니, 아예 목소리를 모으는 일부터 버거워한다. 괜히 어설프게 이견을 밝히다 교섭에 실패하거나 무심한 동료들 태도에 실망했다며 부조리한 세상에 낙담하는 순수한 사람도 있다.

만약 노조가 다른 민주주의 국가처럼 일하는 사람의 보편 조직이었다면 어땠을까. 다양한 사람과 실제로 부딪히며 이해관계를 모으고 갈등을 조정하는 노조의 역할을 이상화하지도, 그렇다고 비하하지도 않으며 일상의 구체적인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아졌을까. 그 역할을 꾸준히 잘 해내는 사람이 선출직이 되는 풍토라면 정치인이나 정치지망생이 지금보다 양질의 사람들로 채워졌을까. 그랬다면 조직노동에 대해 추상적인 말만 앞세우며 조악한 언론 플레이로 조직을 만들겠다는 공허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좀 줄었을까. 노조를 지나치게 ‘타자화’하는 상투적인 화법, 평면적 논의도 힘이 없었으려나. 아, 그리고 나 같은 사람도 칼럼 마감 간격 같은 교섭에서 쉽게 성공했을까.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haeyoonj@naf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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