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한때 유행했던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CSR)이 ‘환경, 사회, 거버넌스(Environmental, Social, and Corporate Governance, ESG)’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CSR이 성공해 진화한 결과물이 ESG일 수 있고, 반대로 CSR이 실패해 대체한 것이 ESG일 수 있다. 기업이 자기 정책을 보다 환경적이고 사회적인 방향으로 바꾸고 기업 안팎의 거버넌스를 투명하고 책임 있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 자체를 폄훼할 이유는 없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옛말처럼 CSR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공헌’이라는 왜곡된 모습으로 불렸다. 책임은 싫더라도 해야 한다는 느낌이지만, 공헌은 싫으면 안 해도 된다는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에 들어온 CSR은 기업의 이미지를 세탁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SK그룹이다.

CSR이 유행하면서 국제연합(UN)도 관련 기준을 만들었는데, 2000년 출범한 ‘유엔 글로벌 콤팩트’(UN Global Compact)가 그것이다. 유엔 글로벌 콤팩트는 CSR의 4개 기둥으로 인권, 노동, 환경, 반부패를 내세웠다. 대다수가 노동자이므로 인권은 노동자의 권리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 수입된 유엔 글로벌 콤팩트는 인권에서 노동자를 지웠다.

노동의 핵심은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ILO 협약 87호와 98호), ‘강제노동 금지’(29호와 105호), ‘아동노동 금지’(138호와 182호), ‘차별금지’(100호와 111호)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동노동 금지 정도만 강조됐을 뿐이며, 아직도 강제노동 철폐 협약 105호는 대한민국 정부가 비준하지 않고 있다.

환경은 기업 내부의 문제인 산업안전보건이 있고, 기업 외부의 문제인 환경보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업 외부의 환경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산업안전보건의 핵심은 안전보건을 노동자의 권리로 보장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노동자가 모든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 안전보건 근로감독에 참여할 권리, 위험한 일을 거부할 권리, 안전보건 교육을 받을 권리가 포함된다.

아동노동 문제도 실업고 청소년들의 현장실습 문제처럼 해결할 과제가 한두 개가 아니다. 반부패는 기업의 투명성을 말하며, 그 전제조건은 정보의 공개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등의 국제기준이 규정하는 기업 정보에는 기업의 지배구조와 기업 임원의 보수가 들어간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입으론 CSR을 말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기업 정보인 재무제표조차 공개하지 않는 기업이 수두룩하다.

최태원 SK그룹 총수는 유엔 글로벌 콤팩트 이사회 멤버로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그는 기업 부패 문제로 감옥에 가는 신세가 됐고, CSR과 관련해 말과 행동이 다른 대표적인 사례로 세계 기업의 역사에 기록돼 있다.

CSR이 유행할 때 한국노총 산하 전국화학노동조합연맹과 함께 <노동조합을 위한 CSR 국제기준>이라는 책자와 <노사가 함께 하는 CSR 체크리스트>를 발간한 바 있다. ‘유엔 글로벌 콤팩트’와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을 기본으로 하고, 당시 유행하던 ‘ISO 26000’과 ‘글로벌 리포팅 이니셔티브’(Global Reporting Initiative) 등을 응용해 책자와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국제기준은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ESG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데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이에 더해 ‘기업과 인권에 관한 국제연합 지도지침’(UN Guiding Principles on Business and Human Rights)(2011년 채택)과 ‘다국적기업과 사회정책에 관련된 원칙에 관한 ILO 삼자 선언’(1997년 채택, 2017년 최신 개정), 그리고 ‘일의 기본 원칙과 권리에 관한 ILO 선언’ (1998년 채택, 2022년 개정) 등도 기업들이 내세우는 ESG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감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러한 국제기준들을 실행하겠다는 약속이 없는 ESG 정책은 모두 가짜다.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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