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블루 안의 화이트

그들을 향한 시선은 권력이다. 담에 둘러싸인 공장이나 담 없는 사회공장에서 일하는 사람 상당수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 SNS에서 ‘좋아요’를 받고 동영상 플랫폼에서 구독자가 많으면 돈도 버는데. 시선은 관심이고 인기며 돈 아닌가. 그건 시선에 호감이 실리고 시선을 받는 쪽에게 이익이 올 때다. 시선에 감시가 있고 시선 받는 쪽에게 불이익이 온다면 시선은 권력이 된다.

익명의 세계에서 실명의 세계로 나오려면 그런 시선을 이겨 내야 한다. 주체가 안 보이는 비가시적 영역과 권리 주체가 보이는 가시적 영역이 있다. 비가시적 세계에서 가시적 세계로 나온 노동자의 모습이 노조다. 노조를 만들고 싶어도 찍혀서 불이익을 당하고 다른 데 취업도 못하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이 있다. 산업과 직종을 불문하고 노조를 만들 때 넘어야 할 문턱이다. 블루칼라의 제조업이나 화이트칼라의 IT산업도 마찬가지다.

한때 사무직이 노조를 만들자 'MZ세대 노조'로 불리기도 했다. 화이트칼라 중심인 IT산업 노조의 사례를 보면 온라인에서 시작해 오프라인 조직으로 전환에 꽤 성공했다. 그런데 칼라가 섞인 곳도 있다. 공장 사무직은 블루칼라 생산직과 함께 있는 화이트칼라다. 사무직이 생산직보다 적은 곳도 있고 많은 곳도 있다. 생산직 노조가 있는데 사무직 노조가 없거나 소수 노조도 있다. 이렇게 생산직에 둘러싸인 사무직을 ‘블루 안의 화이트’라고 할 수 있다. 익명의 온라인에서 부글거리지만 실명의 오프라인이 취약해 어려움을 겪는 등 ‘블루 안의 화이트’가 넘어서야 할 또 다른 장벽을 보여준다.

뒷담화의 진화

권력자나 미운 사람을 씹다 보면 때때로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뒷담화는 온라인 기술에 힘입어 새로운 기회를 맞았다. 온라인 세계는 오픈 카톡방이나 블라인드를 비롯해 빠르고 넓게 퍼지는 뒷담화를 가능케 했다. 이런 곳에서 나오는 주장과 정보는 널리 퍼지지만 대부분 익명으로 올린다는 점에서 뒷담화의 또 다른 형태로 볼 수 있다.

익명의 온라인 공간은 약자에게 자유를 주고 강자에게 빈틈을 만들었을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익명의 온라인 소통방은 실제와 다른 인격을 창조했다. 빠르고 넓게 번지는 폭로나 비판이 가능하고 익명이기 때문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권리 사각지대에서 말 못한 사람들은 별칭(닉네임)을 만들어 실명을 가린 가면을 쓰고 말한다. 별칭은 실제와 다른 인격의 나다.

기업의 관리시스템에 통제받으면서도 이미 있는 블루칼라 노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무직도 온라인에 실제와 다른 인격을 만든다. 이것은 실명이 드러날 경우 당할 불이익 공포를 품고 있는 인격이다. 블라인드 여론이 들끓으면 기업에 타격을 줄 수 있지만, 실명 행동에 이르지 못하면 오래 못 간다. 그래서 사용자는 버틸 수 있다. 요구하고 협상하고 압력을 행사할 권리 주체는 실명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노조는 익명의 인격이 아닌 실명의 주체를 원한다.

블라인드를 비롯한 온라인 익명 소통방은 공론장인가. 여론을 촉발할 수 있기에 공론장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기업의 노사관계를 바꿀 지속 가능한 변화를 이끌 공론장에 미치지 못한다. 여론을 촉발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요하지 않을까. 온전한 공론장은 아니더라도 반쪽 공론장은 되지 않을까.

세계에는 음양이 있고 집단에도 비가시적 세계와 가시적 세계가 있다. 집단에는 공개적인 과정을 통해 공식적으로 만들어진 공론장 활동과 비공개적인 과정으로 비공식적으로 이뤄지는 사적 활동이 있다. 그러나 익명의 활동만 있고 실명의 활동이 없다면 그것은 반쪽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림자만 있고 실체가 없는 사물은 존재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체크오프 문턱

온라인의 불만에서 오프라인의 조직력으로 전환하는 데 넘어서야 할 문턱, 익명에서 실명으로 전환하는 데 넘어서야 할 문턱이 있다. 그 하나가 체크오프다. 체크오프란 조합비를 임금에서 공제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조합원 명단을 회사에 알려야 한다. 체크오프를 적용하는 순간 조합원은 익명에서 실명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익명의 커튼 뒤에서 나오지 못한 채 왜 노조가 제대로 못하냐는 불만족을 얘기하는 사례들을 종종 본다. 그러나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처우개선을 비롯한 드넓은 권리 광장을 기대하는 것은 환상이다.

사용자들은 왜 노조를 싫어할까. 노동자 교육을 하면서 종종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이 ‘이익이 줄어들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자본주의 시민답게 우리는 이익과 불이익 중심으로 본다. 더 깊은 심리적 이유가 있다. 사용자들은 이익이 줄어들 경제적 두려움만이 아니라, 통제가 어려워질 사회적 두려움 등 ‘공포’가 내면에 있기 때문에 노조를 싫어한다. 노조활동 때문에 만난 무노조를 고집하던 재벌그룹은 겉으로 대단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노조에 대한 두려움에 쩔어 있는 쫄보 같았다. 두려운 자들은 격해진다. 그래서 노조만 보면 독하게 달려들었다.

노조에 대한 사용자의 공포는 노동자에게 전염된다. 사용자가 더 많은 힘을 가진 기업에서 노조를 만들려면 두려움을 이겨 내야 한다. 블라인드에서 불만을 격하게 터뜨리지만 실명의 세계로 나서지 못하면 공포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한때 스타벅스 트럭시위가 주목받았다. 이는 온라인에서 오프라인 행동으로 이어진 것이지만, 당사자를 감춘 투쟁의 아웃소싱이었다. 일시적 충격을 줄 수 있으나 지속적 변화를 이끌 주체의 등장은 아니었다.

공포를 넘을 약간의 배포

아직도 노조를 일하는 시민의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가난한 프롤레타리아의 것으로 여기는 왜곡된 태도가 있다. 노조는 이익을 위한 사업체가 아니라 권리를 위한 결사체다. 불의는 참지만 작은 불이익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약간의 불이익이라도 받을 거 같으면 돌아서서 노조를 탈퇴한다. 이익으로 뭉치면 이익으로 망한다. 고임금 사무직 임금인상은 이익의 영역이기에 사회적 지지를 받을 근거가 약하다. 그러나 그들이 일방적 연봉 결정에 맞서 함께 결정하기를 바라는 것은 권리이기에 사회적 지지를 받을 근거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연봉 높은 사무직도 권리가 필요하다.

블루칼라는 상대적으로 격하고 화이트칼라는 상대적으로 순할까. 제조업 노조를 무섭게 생각하는 이미지들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노조 얘기를 하다 보면 자주 느낀다. 하지만 고임금 블루칼라도 있고 저임금 화이트칼라도 있으며, 순한 블루칼라도 있고 온라인 전사처럼 격한 화이트칼라도 있다. 사람은 저마다 하는 노동을 닮아 있다. 그래서 블루칼라는 육체적 ‘하드 파워’를 쓰고 화이트칼라는 정신적 ‘소프트 파워’를 잘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조화롭게 활용하는 ‘스마트 파워’가 필요한 시대다.

모든 노동자에게 그렇지만 ‘블루 안의 화이트’인 사무직 노조가 성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약간의 배포다. 화이트칼라의 공포는 블루칼라와 좀 다르다. 기업 시스템에서 위치가 다르고 승진 기대도 다른 특성이 공포의 색깔을 다르게 한다. 공포의 색깔을 정확히 안다면 공포를 넘어 배포의 영역에 이를 것이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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