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애림(노동권 연구활동가)

한국이 국제노동기구(ILO)에 가입한 지 30년 만에 ILO 기본협약인 87호, 98호를 비준했던 2021년 4월. 비준서 기탁식에서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한국 정부는 앞으로 기본협약의 성실한 이행을 위해 현장에서 노동기본권이 충분히 보장되고, 자율과 책임에 기반을 둔 건강한 노사관계가 형성될 수 있도록 노사와 함께 지속 노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때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요즈음 우리 사회 시계는 거꾸로 흐르는 듯하다.

1998년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의 입법, 2006년 기간제법 입법으로 상징되듯 90년대 이후 우리의 노동법제는 해고를 쉽게 만들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기능을 했다. 사용자의 말 한마디로 쫓겨날 수 있는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이들이 사용자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90년대 말 이후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출현은 해고라는 벼랑 끝에 몰려서 혹은 최소한의 권리라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노동자들의 이런 헌신과 투쟁으로 법원도 조금씩 전향적 판결을 내놓았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의 사용자는 근로계약상 사용자에만 국한된다는 보수적 법리를 깨고, 기본적 노동조건에 실질적 지배력을 가진 자도 사용자라는 2010년 대법원의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판결은 그런 노력들이 쌓여서 나온 성과다. 물론 이 판결이 나온 이후에도 파견·용역·하청업체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해고되고 업체가 폐업돼 사업장에서 쫓겨나고 실질적 사용자인 원청은 교섭은커녕 대화 테이블에도 나오지 않는 행태는 계속됐지만, 끈질긴 노동자들의 투쟁과 학설, 판례를 통해 비정규 노동자들의 노동 3권을 지키기 위한 노조법 개정 공감대는 확산됐다.

지난 9일 노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정부여당과 재계가 한목소리로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요구했다. 대통령이 정말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이는 국제인권법의 ‘인권 역진(후퇴) 금지’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국제인권법으로 보장된 권리를 저해하거나 저해할 목적으로 국내법제를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바로 인권 역진 금지 원칙이다. ILO가 2006년부터 지금까지 한국 정부에 하청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사업주와 단체교섭을 할 수 있도록 촉진하고, 원청과 교섭을 위해 파업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되거나 형사처벌을 받지 않도록 할 것과 노동자 권리를 포기하도록 하는 손해배상 청구의 남용을 제한하는 것을 권했다. 2021년 ILO 기본협약을 비준하면서 한국 정부는 이러한 결사의 자유 원칙을 존중하고 이행하겠다고, 최소한 후퇴시키지는 않겠다는 약속을 한 셈이다.

지난 3월 UN 인권위원회 역시 한국 정부에 2022년부터 벌어진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심각한 탄압에 관한 보고에 우려를 표했다. “노동조합에 대한 낙인찍기, 개입, 사법적 괴롭힘이 없도록 하고 결사의 자유 권리 행사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할 것, “비정규직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가 단결권, 단체교섭권, 파업권을 완전히 행사할 수 있도록 노조법과 관련법을 개정할 것”을 권고했다.

우리가 비준한 수많은 자유무역협정(FTA) 위반의 문제도 제기될 것이다. 대표적으로 한-EU FTA 협정문에는 협정 당사자가 법과 관행을 통해 ILO 기본협약에 따른 기본적 권리를 ‘존중’ ‘증진’ ‘실현’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이 정말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ILO 결사의 자유 원칙에 따른 권리를 존중, 증진, 실현하기 위한 노조법 개정을 무력화시키는 것이고 이는 명백한 국제인권법 위반이다.

물론 국적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 ILO 협약과 헌법, 노동법을 피해 가기 위해 “ILO 조항을 탈퇴”하겠다는 이해하지 못할 언동을 불쑥불쑥 내뱉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국제인권법 위반쯤이야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헌법 6조는 “헌법에 의해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천명하고 있다. 국제인권법 위반은 헌법 위반에 해당된다. 이쯤에서 대통령이 입에 달고 사는 ‘법치’는 도대체 어떤 법을 지키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노동권 연구활동가 (labory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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