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해 한국 노동운동의 아이콘이 된 전태일 열사는 노동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모범업체를 세우는 상상을 했다. ‘태일피복’이라는 그럴듯한 이름까지 붙이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면서도 영업이익을 내 노동자와 사용자가 모두 잘살 수 있는 그런 꿈을 꿨다고 한다. 이 꿈에 다시 숨결을 불어넣는 시도가 눈길을 끈다. 주인공은 전태일재단과 평화시장㈜이다. 두 단체는 지난달 11일 평화시장 지속적 발전과 전태일 확산을 위한 상생협약을 체결했다. 분신으로부터 어림 반세기 만이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화시장 사무실에서 이덕우(66·사진 왼쪽) 전태일재단 이사장과 김영복(67) 평화시장㈜ 대표이사를 만났다.

분신 당시 경영주 이후 세대 ‘인식 변화’

- 재단과 평화시장이 최근 상생협약을 체결했다.
김영복 대표이사(이하 김 대표)
: 평화시장은 전태일로 인해 노동운동의 성지가 됐다. 53년간 노동자와 노동계 관계자들이 많이 찾았다. 그렇지만 평화시장 상인이나 노동자들 모두 말하기 어려운 불편함을 공유했다. 서로 모른 척하는 관계였다. 대표로 취임한 뒤 관계를 개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노동자 방문을 불편해한 것은 평화시장의 1세대 경영주들이었다. 60년대 평화시장 개장부터 장사를 시작한 분들이다. 그때 시작해 70년대까지 이어 온 분들이다. 나는 분류하자면 2세대다. 전태일 분신 이후에 평화시장에 왔다. 지금은 3세대도 있다. 2·3세대는 1세대와 생각이 다르다. 서로 불편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평화시장을 탐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전태일재단도 우리와 생각이 같았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서로 불편을 해소하고 상생하자고 생각했다.

이덕우 이사장(이하 이 이사장) : 김 대표가 말한 1세대 경영주들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평화시장은 실향민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시장이다. 보따리 싸서 월남한 분들이 시장을 일궜다. 그러니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말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당시 경제적 상황도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전태일이 일했던 당시는 매우 열악했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여공들에 대한 착취가 엄청났다. 열사는 이를 개선하자고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한자투성이 해설서를 독학하고 노력하다가 안 되니까 분신까지 했다. 이후 당시의 1세대는 거의 은퇴했고 현재는 새로 상가를 인수해 운영하거나 상속받은 분들이 계신다. 그런데 재단은 노조는 아니다. 전태일 정신을 알리면서 기념사업을 하고, 노조의 힘이 약하거나 노조를 결성하지 못하는 5명 미만 사업장을 지원하는 등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예를 들면 기후위기 같은 문제는 노사가 다 공멸할 수 있는 문제다. 이런 변화상을 생각하면서 전태일다리와 전태일거리가 있는 평화시장부터 상생하는 모범을 보이자 해서 김 대표와 만나 상의하고 협약식도 했다. 이제 시작이다.

- 평화시장의 상황부터 점검해 보자. 활성화 방안이 있나.
이 이사장
: 재단은 세부적인 시장 상황을 속속들이 알긴 어렵다. 그러나 언론보도와 실제 거리를 살펴보면 어려움이 크다. 과거 평화시장을 필두로 동대문 일대는 우리나라 의류산업의 메카이지 않았나. 새벽장 보러 온 이들이 물건 떼가고 하는 것이 당연한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률이 매우 높다. (수입의류 등) 저가 의류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공실률이 높아진다. 인근 다른 의류 쇼핑몰은 점포 소유주가 관리비를 절반 대 줄 테니 장사만 해달라고 하는 지경이다. 이렇게 사양산업이라고 방치하면 안 된다.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가깝게는 지방정부가 좀 더 적극적인 정책을 펴야 한다. 이탈리아 같은 곳은 명품으로 자리매김했다. 평화시장 장인·상인들의 기술이 뛰어난데 이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지방정부가 일자리창출을 말만 하지 말고 젊은 디자이너를 지원해 평화시장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고 판로개척을 지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부의 무관심이 근본적 문제다.

김 대표 : 평화시장이 쇠락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 중국산 저가 의류가 몰려오면서다. 그래서 공장형 시장이었던 평화시장에서 현재는 공장이 많이 사라졌다. 80년대까지 10명 중 8명이 공장을 운영하는 경영주였다면 지금은 2명 남짓으로 줄었다. 그마저도 앞으로 유지가 어렵다. 현재 평화시장은 의류뿐 아니라 잡화로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특히 모자 같은 상품이 강세다. 현재 소매로 운영하는 평화시장 1층의 6할은 모자매장이다. 또 다르게는 작업복 같은 수요가 있다. 백화점에서 작업복 맞추겠나. 평화시장에서 거의 취급한다. 공실률은 현재 6% 남짓이다. 2021년 대표이사 취임 당시에는 10%가 넘었는데 코로나19 확산 과정에서 임대료를 동결하거나 일부 되레 인하했다.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인근의 면목동·창신동·신당동 같은 곳은 가내공업으로 의류를 취급하는 상인들이 많다. 이들은 물건을 만들어 팔면서 매장을 갖는 게 소원인 분들이다. 평화시장은 이들에게 소자본으로 점포를 열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건물주와 협의해 남아 있는 공실을 싸게 공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유지에 고객쉼터를 설치하는 등 여러 가지 환경개선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인터넷 쇼핑몰까지 구축했더니 (이런 사례를 본 적 없는) 서울시 공무원들이 의아해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발전하고자 한다.

이 이사장 : 평화시장은 특화점이 필요하다. 인근 광장시장은 먹을거리로 특화돼 최근 중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유럽 관광객도 몰려온다. 발 디딜 틈이 없다. 광장시장 경영진의 노력이 지대했을 것이다. 평화시장은 문화적인 수요를 충족시할 수 있도록 특화할 필요도 있다. 김 대표 언급처럼 평화시장은 노동자와 노조가 많이 찾는다. 때마다 전태일다리와 동상 앞에서 행사를 한다. 조금 더 관심이 있는 이들은 현재는 없어진 청계피복노조 사무실터도 찾는다. 이런 이들이 시장 안에서 쉬면서 상품을 구입할 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 광장시장에서 먹을거리를 즐기고 조금 더 걸어 오면 한국의 상징적인 의류시장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지방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 서울시가 재래시장 살리기를 말하지만 지금 광장시장과 경동시장 정도 제외하면 활성화 된 곳이 드물다. 각 시장별 특성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관광객에게 백화점의 고급의류만 선뵐 게 아니라 야시장의 의류쇼핑 같은 콘셉트를 차용하면 된다.

김 대표 : 이 이사장의 지적이 옳다. 특히 인력부문도 문제다. 봉제산업이 쇠퇴기에 접어들어서 현재 희망을 찾기 어렵다 보니 신규인력이 유입되지 않는다. 지금 연로한 가내공업 상공인만 남은 상황인데, 정부가 지원을 통해 봉제산업에 종사해도 먹고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줘야 한다.

▲ 이덕우 전태일재단 이사장 <정기훈 기자>
▲ 이덕우 전태일재단 이사장 <정기훈 기자>

“같은 시대 살았던 전태일의 숭고한 희생정신 높이 평가”

- 상생협약은 전태일 정신의 확산도 강조하고 있는데. 두 분에게 전태일 열사란 어떤 사람인가.
김 대표
: 평화시장 대표이사이지만 전반적인 경영주들의 의견과는 다르다. 나는 1975년 평화시장 점포 점원으로 들어왔다. 점원으로 일하다가 군입대를 했다가 전역한 뒤 창업을 했다. 당시에는 어려웠다고들 한다. 시골에서 상경한 노동자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 안 하고 산업일선에 뛰어들었다. 먹고 살아야 했다. 공장에 취직해 일하는데 급여 수준도 낮고 먹고 살기 힘들다. 나이도 어리고 상황도 어려웠던 시대상황이라고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인권탄압, 착취다. 모든 경영주가 그런 건 아니라고 하지만 대부분은 인권탄압, 착취였다. 우리 전태일 열사는 20대에 그것을 꿰뚫어 봤다.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자기 목숨을 던지면서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노력했다. 높게 평가한다. 당시 같이 있었던 1세대뿐 아니라 2세대 중에도 그를 낮게 보거나 박한 평가를 주는 이들도 많고, 그래서 전태일재단을 굳이 외면한 것도 있었다. 그런 인식의 전환을 만들어 준 것이 전태일재단이 발행한 평화시장 상품권이다. 노동운동가나 노조 등 평화시장을 방문하는 이들이 상품권을 평화시장에서 쓰면서 전태일재단이 평화시장의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한다는 인식이 확산했다. 감사하다. 덕분에 관리회사(평화시장㈜)도 경영주와 상인에게 공문도 보내고 방송도 하면서 전태일재단의 노력을 알렸다. 서로 이미지 개선이 많이 됐다. 이런 게 상생 아닌가.

이 이사장 : 처음 전태일재단 이사장직을 맡아 달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마음이 무겁고 어려웠다. 그의 삶을 보라. 전태일의 분신이 스물 두 살이었다고 한다. 삶의 궤적을 담은 평전을 읽고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초등학교도 2년 밖에 못 다녔고 졸업도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법전을 읽었을지 기적이다. 당시 전태일은 평화시장 재단사였다. 대접이 좋다. 조금만 더 일하면 공장을 마련하거나 점포를 낼 수 있을 정도의 경력이다. 그런 그가 버스비 아껴 풀빵을 사고 걸어서 출·퇴근을 한 것 아닌가. 사람에 대한 사랑, 연민, 애정이 대단하다. 상황을 개선하려고 직접 동료를 모아 실태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들고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개선을 요구했다. 콧방귀도 안 뀌었지만 경향신문 기자가 기사를 써 줘 너무 기뻐 수백 부를 사서 시장에 뿌리고 다녔다. 대통령에게 편지도 써 봤지만 개선이 안 돼 결국 목숨을 바쳤다. 노동 관련 활동을 하는 목사들이 거진 예수님이라고 했다. 빼 놓을 수 없는 게 모친인 이소선 여사다. 아들의 유지를 이어 41년간 노동운동과 인권운동을 하셨다. 어머니가 안 계셨다면 전태일 열사가 잊혔을 수도 있다.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다리에서 올려다본 평화시장,  전태일도 활성화 꿈꿨을 것”

- 두 분은 삶의 궤적도 가진 입장도 다르다. 상생협약 체결의 배경은 무엇인가.
김 대표
: 앞서 말한 대로 노동단체가 꾸준히 평화시장을 찾는다. 1세대 경영주들이 있을 때는 부딪힘도 있었다. 평화시장 건물 진입을 막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생각이 달랐다. 같은 세대, 같이 고생한 인간으로서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런 인식을 하고 있어서 이 이사장이 상생을 말하고 한석호 재단 사무총장이 몇 차례나 방문을 하면서 공감했다.

이 이사장 :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울 중구노동자지원센터와 함께 재단이 매년 가을 잔치를 한다. 전태일다리축제다. 횟수로 8회다. 올 때마다 평화시장 건물을 보면서 불편한 감이 있었다. 그런데 전태일 열사를 생각해서라도 평화시장이 활성화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전태일 본인도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고 착취만 하는 그런 상황을 보면서 모범기업을 고민했다. 평화시장 상인들이 모두 ‘근로기준법 지켜서는 먹고 살 수 없다’고 말하는데 정말 그런지 고민한 것이다. 공장을 하나 만들어 미싱을 8~9대 놓고 재단사 한 명에 미싱사 두고, 시다를 몇몇 두고 옷을 몇벌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수입이 얼마가 나오는지 봤다. 단순하게 계산한 게 아니라 각각 임금과 원단값까지 생각하면서 고려했다. 그런 구상에 붙인 이름이 태일피복이다. 그런 회사를 만들어 근로기준법을 다 지키고도 다른 곳보다 더 나은 월급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모범기업안이다. 나중에 이런 자료를 회계사나 경영학자들이 검토한 결과 현실성이 있었을 것이란 말들을 했다. 그런데 결국 자본이 없지 않았나. 전태일은 그래서 자기 눈을 기증할 테니 자본을 달라고 하는 고민까지 했다. 상생이라는 게 그렇다. 정부는 중소상인이 활성화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사용자는 노동자의 8시간 노동의 결과로 이익을 내고, 노동자는 이익으로 더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이다. 그런 것을 전태일이 꿈꿨다. 재단은 노조는 아니지만 그렇게 합리적으로 고민했다. 그래서 중구노동자지원센터를 통해 평화시장과 이야기하고 우리 사무총장이 다리를 놓으면서 이야기를 텄다. 김 대표가 아주 흔쾌하게 응해 줬고 전태일다리축제 사진전에도 60년대부터의 소중한 사진자료를 내 줘 축제를 성황리에 진행했다. 이곳 평화시장 사무실(평화시장 4층)이 있는 옥상에도 전시해 여러 관계자들이 보고 갔다. 이를 통해 가교를 놨다.

김 대표 : 그렇다. 재단에서 내민 상품권으로 인해 경영주가 전태일재단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처음에는 전태일재단을 대표이사(김 대표)가 왜 만나는지 모르겠다고 하던 주주들이 있었는데 이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서로 상생하기 위해 바람직하다고 평가한다.

이 이사장 : 상생을 위해 평화시장의 판로를 재단을 통해 추가적으로 마련할 수도 있다고 본다. 작업복 같은 것은 이미 평화시장을 통해서 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서 노조마다 조끼나 모자 등 맞추지 않나. 이런 품목을 평화시장을 통해 구한다면 판로가 확보된다. 양대 노총 조합원의 5%만이라도 응한다면 평화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다. 이런 노사상생의 길목에 정부 지원을 요구하기도 용이하다.

김 대표 : 너무 감사한 이야기다. 지금 작업복 같은 것을 평화시장을 통하고 있지만 중간 유통마진이 있다. 그러지 않고 평화시장을 직접 통한다면 원가절감도 분명 가능하다. 평화시장을 노동운동의 성지로 가꿔야 하는데 평화시장이 쇠퇴해 없어진다면 요원하다. 이런 점을 고려해 서로 상생할 필요가 있다.

- 평화시장 내에는 노조도 있고 노동자도 있는데. 이들을 위한 계획은.
김 대표
: 과거 공장을 운영할 때는 노동자가 많았지만 현재는 줄어 가족단위 운영이 많다. 제조업 노동자보다 1층 소매를 위주로 서비스직 노동자가 많다. 이들은 이곳에서 일과 기술을 배워 창업을 하는 게 목표인 분들이다. 운송노동자들이 남아 있지만 택배가 활성화되면서 이들도 많이 줄었다. 새로 인력 유입이 이뤄지지 않아 고령화됐다. 이 때문에 원단 같은 물건 배송을 힘들어 한다. 영세한 관리회사로서는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기가 쉽지 않다. 관리운영회사 자체 직원이 속한 평화시장노조가 있는데 조합원은 60여명 정도다. 이들과도 협조할 수 있는 대목을 찾아 노력할 계획이다.

이 이사장 : 재단은 앞서 언급한 창신동·면목동·신당동 일대의 5명 미만 공장과 성수동의 제화노동자, 종로 주얼리 노동자 같은 열악하고 근로기준법 적용도, 노조 결성도 못하는 노동자를 돕고 있다. 앞으로도 이런 노동자, 그리고 소상공인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노동자와 사장의 구분이 잘 되지 않기도 하고 어려움이 많다. 평화시장에 대해서는 현재 사양산업이기 때문에 산업을 유지하고 서로 슬기롭게 파이를 키울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파이를 키우자는 것이 결국 분배의 문제로 귀결돼 착취를 강화하곤 했지만, 현재 평화시장과 봉제산업은 어려움이 큰 상황이라 노동자와 사업주가 상생의 약속을 통해 파이를 유지하고 키우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함께 노력하겠다.

글=이재 기자
사진=정기훈 기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