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을 위한 종합예술단 봄날의 공연에 우연히 참석했다. 영등포 산업선교회의 공연장은 소박했지만, ‘돈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은 죽지 않아야 한다’는 노랫말은 울림이 있었다. 위로와 연대가 필요한 현장을 찾고자 각계 시민이 매주 연습으로 만든 하모니는 아름다웠다. 영등포구 시민을 비롯해 머리가 허연 어르신 관객도 인상적이었다. 문득 우리 정당은 시민에게 어떤 경험과 세계를 제공하나 싶어 복잡한 상념이 스쳤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당은 시민의 생활세계를 구축한다. 정당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당에서 운영하는 보육시설에 아이를 맡기고 관련 생협에서 장을 본다. 당원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치료받고 지역당 센터에서 문화생활을 즐긴다. 정당은 선거나 뉴스만이 아니라 시민 일상에 존재한다.

한국에선 주로 사회의 새로운 지지자가 필요한 진보정당이 비슷한 노력을 했다. 당의 역사가 안정적으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시민에게 이념과 조응하는 생활세계를 구축하진 못했다. 정강정책은 입시교육을 비판하고 공교육을 강조하나 당원조차 자녀를 학원을 보내고 입시에 매달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다. 특별히 분쟁 사업장에서 일하는 게 아니면 개인의 직장 고민과 당의 노동의제는 잘 연결되지 않는다. 문화생활과는 더 접점이 없다. 개인 삶과 정치의 거리가 먼 데도 작은 정당에 수십 년 표를 던져온 5~10%의 유권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오랜 부침을 거듭한 진보정당이 다수파가 되거나 훌륭한 통치집단이길 기대하는 마음은 좀 줄지도 모르겠다. 다만 기업의 이해보다 일터에서 죽고 다치는 시민의 이해가 먼저인 정당도 하나쯤은 좋겠다 싶고, 안전한 일터를 위해 노력해온 ‘시민조직’을 존중해 단식에 나서는 정치인도 필요하겠다 싶어 지지하는 시민도 적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진보정당이 사회단체나 결사체 이상으로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규범력 있는 법률도 제안하고, 포괄적 안전관리 체계를 구축할 대안도 제시하는 유능한 대안정당이 된다면 더 좋을 것이다. 다만 말이나 선언이 정치적 권위를 가지려면 일하며 죽고 다치는 현장에 대한 장악력이 있어야 한다. 다양한 형태와 업종에서 일하는 시민의 온갖 민원과 각종 분쟁사례가 지역조직이나 부문위원회를 통해 집합돼야 힘이 실린다. 그래야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거나 고민하며 싸워온 조직·단체와 신뢰 속 협력도 가능하고 발언권도 커진다. 단번에 가능할 리 없다. 다양한 상황을 집약해 중앙당의 내용으로 만들 수 있도록 당 조직 체계를 갖춰 운영한 시간이 쌓여야 한다.

그런데 지역과 조직을 키우는 과제가 어렵고 지난해 사람들이 지친 탓일까. 언젠가부터 사회 제반 계층과 세력을 조직해 그들 목소리를 들으려는 고민보다 ‘국가’의 관점에서 사회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나를 따르라는 주장이 늘었다. 느슨하게나마 협력했던 단체나 결사체에 대한 존중도 희미하다. 오히려 낡은 ‘운동권 정치’이자 개혁의 대상이라 목소리를 높이는 이도 있다. 그렇다고 새로운 ‘집단’이나 지지기반을 조직할 방법을 밝히는 것도 아니다.

그간 양당은 국가의 관점에서 사회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했다. 사회 기반 없는 정책 집행에 문제점도 많지만 어쨌든 이런 방식에선 자원이 많은 거대 정당이 유리하다. 진보정당의 유능함은 좀 달랐다. 전체로 억압했던 다양한 부분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부문의 이해를 대표하는 단체를 존중해 세를 모아 다른 의견과 주장에 힘을 실었다.

방식이 비슷해지는 이유에는 정당으로서 대표하려는 세력도, 세계관도 차이가 줄어서 같다. 양당에 대한 반대만 있고 정치적·이념적·계층적 정체성은 중요하지 않으니, 어제는 반대했던 정치인이 오늘은 합당의 대상이라 부추길 수 있으리라. 당원이나 지지자를 느슨하게나마 묶던 최소한의 집단적 정체성이 와해돼도 당의 존속을 자신하는 것 같다. 정말 양당에 대한 혐오만 공통점인 ‘원자화된 개인’만으로 대안정당이 조직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과연 진보정당을 비롯해 대안정당이 조직되고 제도화가 가능할지 의문이 커지는 요즘이다. 선거는 평소 정당들이 조직적으로 좋은 활동을 했는가에 대한 평가이자 결과값에 가깝지 갑작스러운 기회의 장이 아니다. 이미 있는 당원, 지지자, 활동가 정치엘리트 등 주어진 자원을 효과적으로 재통합하는 데에 실력을 발휘하는 리더와 정치세력의 등장을 희망한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haeyoonj@naf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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