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일제에 의해 이식된 자본주의 덕분에 조선에서 노동자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1920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 그해 5월 노동대회, 1922년 조선노동연맹회,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 1925년 조선공산당, 1927년 조선노동총동맹이 결성됐다.

1930년대 일제는 군국주의로 내달렸고, 국민총동원에 기반한 전시경제체제를 수립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노동문제는 본격적으로 조선총독부의 국가보안(state security) 문제로 취급됐다. 민족해방과 노동해방을 동시에 지향했던 조선의 노동운동은 공산주의로 간주됐다. 노동문제는 물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도 타도해야 했고, 조선총독부는 노동운동을 분쇄하고 이를 근로운동으로 대체하려 했다.

1938년 4월 일본제국의회가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자, 다음달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이를 시행했다. 1938년 6월 일본제국은 ‘학도근로보국대실시요강’을 발표했고, 그해 11월 조선총독부 경무국 학무과에 ‘경제경찰계’가 신설됐다. 1939년 3월 일본제국은 ‘임금통제령’을 발령하자 그해 8월 조선총독부는 이를 조선에서 시행했다. 1939년 7월 일본제국은 1차 ‘노무동원계획’(노동력 110만 확보 목표)을 발표했고, 1940년 7월 2차 ‘노무동원계획’(노동력 115만 확보 목표)을 발표했다.

1940년 11월 일본제국 각료회의가 발표한 ‘근로신체제확립요강’은 근로(work)가 노동(labour)을 완전히 대체했음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일제는 본토의 전국노동조합동맹(1930년 결성)과 일본노동총동맹(1936년 결성)을 해산하고, 대일본산업보국회를 출범시켰다. 모든 경제 단위에서 노동조합은 해체되고, “근로조직”으로서 산업보국회가 조직됐다. 산업보국운동으로서의 근로조직운동이 노동조합운동을 대체했다.

“근로는 황국민의 봉사활동으로서 그 국가성·인격성·생산성 일체를 고도로 구현해야 한다. 따라서 근로는 황국민의 책임이며 영예로운 일이다”고 시작하는 ‘근로신체제확립요강’은 “전(全)인격의 발로로서 창의적·자발적으로 되는 것을 기조로 근로정신을 확립”하고 “단위 경영체에 근로조직을 확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내세웠다. 근로조직은 사업장 단위를 넘어 지방과 산업 단위에 근로조직연합체를 설립했고, 대일본산업보국회를 중앙조직으로 해 지방과 산업을 거쳐 사업장에도 근로조직으로서의 산업보국회를 결성했다.

조선총독부 조직과 서류에서 노동이라는 말은 근로로 완전히 대체됐다. ‘노동관’은 ‘근로관’으로, 심지어 ‘노무관리’도 ‘근로관리’로, ‘노무과’도 ‘근로과’로 바뀌었다. 노동단체가 아닌 근로조직으로서의 산업보국회는 일본식 기업별노동조합의 모체로 이후 한국의 기업별노동조합의 역사적 기원을 이루게 된다.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한 날인 1941년 12월8일 일본제국은 청소년 강제동원과 노동자의 공장 간 이동금지를 내용으로 하는 ‘노무조정령’을 발령했고, 조선총독부는 이듬해 1월 이를 시행했다. 1944년 8월 조선총독부는 ‘조선학도근로령’과 ‘여자정신근로령’을 시행했다. 그리고 1945년 3월 조선총독부는 ‘국민근로동원령’을 공포함으로써 이후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근로체제의 기반이 될 국민총동원 체제를 완성시켰다.

미군정을 거치면서 살아남은 조선총독부의 근로체제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 똬리를 틀었다. 근로자라는 말만 가득한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이 대표적이다. 1987년 헌법에 존재하는 것은 ‘근로’ 3권이지, ‘노동’ 3권이 아니다.

조선총독부는 근로가 노동을 대체한 체제를 창조했고, 아직도 대한민국의 국가권력은 노동이 아니라 근로를 공식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할 때, 한국의 노동문제(labour questions)가 그 자체의 위상을 확보하지 못한 채 근로문제(work questions)의 일부로 취급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친일파 청산을 이야기하는데, 노동문제에서도 그 문제, 즉 ‘조선총독부 근로체제’는 여전히 살아 있다.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