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혜경 노동법 박사
▲ 유혜경 노동법 박사

남전노조 쟁의

1953년 2월부터 신현수·김경호 등이 노조 조직에 착수했으나 남전 사장 박만서가 노조결성을 반대하고 조직준비에 가담한 종업원들을 박해하고 신현수 등을 파면하자 남전노조준비위원회는 1955년 2월19일 남전노조를 결성했다. 노조는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조임원 4명에 대한 해고철회와 부당노동행위 중지를 요구한다.

남전노조 쟁의는 사용자가 노조결성에 반대하고 노조를 결성하려는 근로자를 해고한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사용자의 지속적인 노조설립 방해공작과 부당노동행위로 쟁의가 확산했다. 따라서 남전노조 쟁의는 사용자의 노조설립 방해공작이나 부당노동행위가 쟁의의 주요한 원인이다. 노조에 대한 사용자의 반감으로부터 쟁의가 시작되고 확산했던 사실로부터 1950년대 후반기의 쟁의의 특징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대구 내외방직 노동쟁의

대구시 소재 내외방직노조는 1953년 10월 법에 의거해 설립됐다. 1954년 9월 초에 노조는 임금 60% 인상을 회사측에 요구했지만 회사는 전면으로 거부했다. 이와 같은 회사측의 억압적인 태도로 노조위원장이 사퇴하고 노조측은 새로운 대의원대회를 소집해 새로운 위원장을 선출했다. 임금인상 60% 요구를 재확인해 1954년 10월22일 임금인상 쟁의를 제기한다.

사용자는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에 대해 40% 인상으로 합의를 하고 쟁의가 종결된 지 1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노조위원장을 해고했다. 해고 취소를 요구하면서 노조가 행한 재파업에 대해 폭력배를 동원해 탄압했다. 그리고 경상북도 당국의 조정을 받아 해고취소를 결정하지만 그후 태도를 바꿔 재보복 조치를 하고 어용노조를 설립해 대응한다. 결국 내외방직 쟁의는 자동적으로 소멸해 버리고 만다. 이 사례에서 사용자의 반노조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사용자가 어용노조를 만들어 노조를 무력화하는 것이 당시에 일반적이었고 노사관계의 한 특징을 이뤘음을 알 수 있다.

대구 대한방직 쟁의

대구 대한방직 대구공장은 자유당 재정부장 설경동이 권력층과 결탁해 1955년 말 헐값에 인수받은 회사다. 설경동은 공장을 인수받자 곧 노동자 2천600명을 경영합리화라는 명목으로 해고하고 그중에서 자기와 가까운 200명만을 다시 고용해서 어용노조를 만든다. 한편 새로 고용된 노동자들은 모두 하루 12시간 노동에 종사해야 했고 간부들은 노동자들에게 폭언을 하면서 통솔하려 했다. 조금만 간부들의 눈밖에 벗어나면 해고시키는 등 횡포를 자행한다. 이에 전체 노동자들은 회사측의 횡포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1956년 1월 노조 임시대의원대회를 개최해 어용노조 간부를 축출하고 새로이 김상연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2월에 쟁의에 돌입한다.

결의내용은 첫째 4천500환이던 임금을 2만5천환 수준으로 인상할 것, 둘째 불하 당시 채용예정자로 회사측이 공약한 1천392명을 즉시 완전채용할 것, 셋째 기업주측의 노동운동 간섭을 배제할 것 등이다.

1952년에 있었던 부산 조선방직 쟁의가 비록 쟁의자체는 패배로 끝났지만 대한민국에 노동관계입법을 촉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던 것처럼 1956년의 대구 대한방직 쟁의는 중요하다. 그 이유는 투쟁의 과정에서 어용적 태도를 취한 대한노총 경북지구연맹에 반발해 새로이 대한노총 대구지구연맹을 구성케 했기 때문이다. 대구지구연맹은 그 뒤 대한노총 광산노조연맹과 더불어 대한노총의 부패와 어용에 반대하고 노동운동의 민주화를 위한 전국노조협의회의 주축이 됐다. 대한방직 쟁의가 이 시기 노동운동의 대표적 사례로서 꼽히는 주요한 이유는 대한방직의 사장 설경동이 자유당의 재정부장으로 있었던 사정으로 중앙의 대한노총과 섬유노련의 방해를 받는 불리한 조건에서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김말용으로 대표되는 대한노총 대구지구연맹이 중앙지도부와 달리 쟁의에 적극 개입, 지원해 이들을 주축으로 전국노조협의회가 결성되었기 때문이다.

전국노조협의회는 정치와 출세를 지향해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하던 부패하고 타락한 지도부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인권수호와 복리증진을 위해 투쟁”하는 “진정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노조의 발전”을 지향해 만들어진 조직체다. 그런 만큼 전국노조협의회의 조직적 탄생의 배경이 된 대한방직 쟁의는 그 의미가 크다.

경남 밀양모직 미불임금 쟁의

경남 밀양에 소재한 한국모직공장에서 1957년 3월에 임시고용돼 일하다 동년 11월에 해고당한 800여명 중 일부 공원들은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된 지 6개월이 넘도록 임금을 지급받지 못했다. 이런 사유로 1958년 3월11일 사장 김형덕을 만나려고 사무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게 된다. 종업원대표 54명은 폭우를 맞으면서 김형덕 사장 집 정문에서 면담을 요청했는데, 김 사장은 가혹하게도 맹견 두 마리의 고리를 풀어 기진맥진한 종업원들을 마구 물어뜯게 했다. 그중 2명이 중상을 입어 입원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한국모직의 임금체불과, 노동자들이 맹견에 물린 사건에 대해 1958년 7월6일 대한매일신문은 회사 사장의 부도덕성을 비판했고, 1958년 7월5일자 한국일보도 인금체불에 대한 부도덕성을 비판했다. 한국일보는 “우리나라의 경우 위 대기업의 기업주들이란 극소한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정치세력에 아부하거나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일확천금을 얻었거나 전후의 혼란기를 이용해 각종 권력을 이용해 노력하지 않고 거금을 획득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세인이 주지하는 사실이다. 기업가의 윤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위인들이 노동자의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도 거리낌조차 없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며 만연해 있는 임금체불에 대해 사용자를 강하게 비판했다.

경남 밀양모직 쟁의는 체불임금이 원인이 돼 발생했다. 당시 서울신문에서 발표한 5개 주요기업의 임금체불 현황을 보면 당시 임금체불이 얼마나 비일비재했는지 알 수 있다. 임금체불에 대해 정부당국이 강력하게 대응한 결과 경남 밀양모직 쟁의도 해결된다.

당시 노동쟁의의 큰 특징인 임금과 관련된 쟁의로서 임금체불이 주요한 문제가 됐던 사례라는 의의가 있다.

부두 노임횡령 고발사건

부산 부두노동자들의 반김기옥 투쟁

1958년 11월에 일어난 부두 노임횡령 고발사건이란 부산과 인천의 부두 노조위원장들이 조선운수사장과 결탁해 부두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노임을 부당하게 횡령·착복했다는 것을 김인숙·김관호·최종자 3명이 서울지방검찰청에 고발한 사건이다. 정부도입 물자의 조작비(1950년대 부두노동자들의 하역작업은 그 대부분이 정부도입 물자의 하역작업이었는데 정부도입 물자는 그 하역작업을 위한 조작비를 매년 예산에 책정하고 있었음)를 국회를 통과한 정부예산에서 인상해 줬는데도 조선운수 주식회사가 어용적 부산부두노조 위원장 김기옥 및 인천부두노조 위원장 이창우와 결탁해서 노임을 인상해 주지 않고 횡령·착복한 사건이다. 1958년 10월 11차 대한노총 전국대의원대회에서 규약을 개정시켜 김기옥이 위원장을 차지하게 되자 이에 반발한 세력들이 김기옥의 과거 비행을 고발해 국회에 진정함으로써 부두 노임 횡령고발 사건이 터지게 된 것이다.

한편, 1959년 5월 부산 부두노동자들이 김기옥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 벌인 투쟁은 김기옥을 반대하는 2개의 노조 지부와 12개의 분회장 및 그 산하 노무반장들이 참가한 투쟁이다. 이들은 김기옥이 때마침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해 출국 중인 기회를 이용해 김기옥의 비위를 폭로하고 투쟁을 개시했다. 부산부두노조 부위원장 2명과 임원 15명에 대해 1959년 7월 1일 △400만환의 육군기지창 노임 횡령 △한국운수비료 노임협약 부정 체결 △제3부두 미군작 업관계 입찰부정 등 김기옥의 비행을 폭로함으로써 부두노조의 혁신을 외쳤다. 투쟁을 전개한 부위원장들이 1959년 7월6일 조합운영 공개, 전체 임원 불신임 등을 토의안건으로 부산부두노조 대의원대회의 소집을 공고했다. 그러나 김기옥을 옹호하는 자유당과 경찰이 노조집회를 불허해서 대의원대회가 좌절됐고 혁신파 21명의 간부연행 및 경찰파견 등으로 김기옥을 반대하던 부위원장들이 밀려나는 것으로써 일단락된다.

반김기옥 투쟁은 대한노총의 간부진을 혁신함으로써 대한노총의 자주성과 민주성을 확장하려던 투쟁이었으나 자유당과 경찰에 의해 좌절됐고, 4·19 혁명이라는 전 민중적인 항쟁이 일어날 때까지 김기옥 체제는 유지된다. 이 투쟁을 통해서 대한노총 상층부가 얼마나 자유당정권 및 권력과 결탁하고 있었는지 확인된다.

교원노조 결성

교원노조의 결성은 1960년 4월29일 대구 시내 중·고교 교원대표 60여명이 경북여고에 모여 대구시 교원노조 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전국에서 교원노조 결성을 촉구함으로써 시작된다. 대구지역에서의 움직임을 출발점으로 해 같은 시기 대구에서 대학 교수들의 노조가 구성됐다. 5월1일에는 서울 시내 47개 중·고교와 3개 국민학교 교원들이 동성고에 모여 학원의 자유, 교육행정의 부패 제거, 교육의 질적 향상과 권익옹호를 주장하며 서울시 교원노조 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교원노조는 기존 교육 부문 모순의 실체를 이루고 있는 대한교련 및 대한교련의 행정적 통제기구 역할을 하고 있던 교육회와 결별함으로써 그동안의 대한교련의 비자주성을 극복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이승만 정권의 시녀이자 충복 역할을 하고 있는 대한노총을 부정하고 “노조의 자주성”을 표방하는 전국노조협의회와 제휴함으로써 혁신운동을 표방하고 있다.

5월22일에는 일부 지방대표를 포함해 초·중·고교 및 대학 교원 300여명이 서울에서 대한교원노조연합회를 결성했다. 본격적인 전국조직은 아니었지만 전국조직 설립의 모체가 된다. 이후 과도정부의 한계 속에서 정부의 탄압을 받으면서 지역단위 교원노조연합회가 잇따라 결성되다가 드디어 7월 7일 서울의사회관에서 교원노조는 제1차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했다. 전국조직의 명칭을 불완전한 형태로 발족했던 ‘대한교원노조연합회’에서 ‘한국교원노조총연합회’로 바꾸고 전국조직 체계를 확립한다.

전국조직이 발족한 시점에서 교원노조는 이미 전체 교원수의 약 22%에 해당하는 1만8천여명의 조합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교원노조가 겨우 3개월가량의 짧은 기간에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급속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교육부문 내부에서 교원노조의 결성을 위한 역량이 상당히 축적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4·19항쟁이 이런 역량의 분출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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