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최근 답변서를 작성했다. 대법원에 제출하기 위해서였다. 피고 사측이 제출한 상고이유서에 대한 답변이었다. 상고이유서에는 소멸시효 항변은 권리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내 답변은 회사의 약속을 믿고서 기다렸더니 이제 와서 소멸시효 기간이 도과했다고 사측이 항변하는 것은 권리남용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현대차그룹사의 통상임금 사건이었다. 기아·현대차·현대제철 등 다른 그룹사업장들과 마찬가지로 현대트랜시스에서도 통상임금 문제에 관해서 노사합의를 했다. 기아·현대차·현대제철 등 다른 그룹사업장들과는 노동자들이 기다렸다는 점이 달랐다.

기아에서는 2011년 10월 조합원 약 2만8천명이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2014년에 대표소송을, 2017년에는 다시 조합원 약 2만5천명이 소송을 제기해서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면서 미지급임금을 청구했다. 현대차에서는 노사합의에 따라 2013년 대표소송을 제기했으며, 현대제철에서도 조합원 수천명이 3차에 걸쳐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현대트랜시스에서는 2014년께 그룹사의 소송 결과를 적용하기로 노사합의하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2019년에 사측이 기아 등 그룹사의 결과를 적용해 주지 않았다. 비로소 조합원들은 소송을 제기하게 됐다. 그랬더니 사측은 임금채권의 소멸시효 3년이 지났다고 항변하고 나왔다.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있었으니 임금채권 청구 기간을 도과해서 기각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현대트랜시스 노동자들이 무작정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룹사의 결과를 적용하기로 노사합의했던 것을 믿고서 기다렸던 것이다. 그래서 노사합의로 회사가 약속한 것을 믿고서 기다렸던 것인데, 회사의 소멸시효 항변은 권리남용으로 인정될 수 없다고 답변했던 것이다.

2. 기아·현대차·현대제철 등 현대차그룹 사업장들에서는 통상임금 소송이 진행되던 중 과거 소급분에 관해서는 조합원들은 소취하 내지 부제소합의를 하고서 일정금액을 지급받고, 장차 상여금 중 일정부분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키기로 노사합의해서 통상임금 문제를 정리했다. 물론 이러한 노사합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조합원들은 사측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다. 이미 한 근로 대가인 임금채권은 해당 노동자에 귀속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의사가 아닌, 노동조합이 합의로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에 관한 통상임금 소송을 계속했던 것이다. 한편 현대트랜시스에서도 조합원들이 통상임금소송을 제기하게 되자, 그제서야 다른 현대차그룹 사업장들처럼 노사합의가 이뤄졌다. 그리고 그 노사합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조합원들은 여전히 소취하를 하지 않고 소송을 계속해 왔던 것인데, 바로 여기서 사측은 위와 같이 소멸시효 항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소멸시효 항변은 현대차그룹에서 현대트랜시스 사건에서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아에서, 현대차에서도 현재 진행 중인 통상임금 소송사건에서 사측이 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소송에 노사합의한 청구기간에 대해서 이 같은 항변을 하고 있다.

3. ‘임금채권 소멸시효 기간 3년을 도과했다는 소멸시효 항변은 권리남용에 해당한다.’ 법률용어로 답변한 것인데, 쉬운 말로 해 보자. 회사가 약속해서 믿고 기다렸더니, 이제 와서 기다린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서 부당하다는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 대법원은 전원합의체판결을 통해서 “채무자가 시효완성 전에 채권자의 권리행사(가) 불필요하다고 믿게 하는 행동을 하였거나 …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채무자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해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대법원 2008. 9. 18. 선고 2007두2173 전원합의체 판결). 현대트랜시스의 경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010년대 초부터 상여금 등의 통상임금 해당성에 관해 우리 노동현장에서 크게 논란이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 재판부는 2013년 9월 공개변론을 진행하고서 2013년 12월 갑을오토텍 사건에서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할 수 있다는 판결을 선고하게 된다. 당시 기아자동차·현대제철 등 현대차그룹사들에서 정기상여금 등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추가 법정수당을 지급할 것으로 사측에 요구했고,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자 법원에 대규모 소송을 제기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현대차그룹에 속한 현대트랜시스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로 요구했던 것이다. 즉, 2014년 이 회사(2014년에는 ‘현대파워텍 주식회사’였다) 노사협의회(당시 회사에 노동조합이 조직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노사협의회의 근로자위원들이 근로자들을 대표해서 피고 회사와 임금 인상 합의 등 노사합의를 했다)를 통해 노동자측은 “2014년 임금요구안”으로 “통상임금 재산정 및 미지급 임금을 지급”해 줄 것을 요구했던 것이고, 노사 간 협상을 진행한 끝에 “통상임금 관련 그룹사 합의 결과를 준용”하기로 합의했다. 그 뒤 노사합의를 통해 매년 그 합의의 준수를 약속해 왔다. 이에 대해서는 이 회사에서 노동조합이 조직된 이후에는 노동조합과의 단체교섭 등에서도 이를 지속적으로 확인해 왔다. 사측의 상고이유서에서는 이러한 노사합의가 노사 실무 차원에서 논의한 내용을 회의록으로 정리한 것에 불과하고 비공개로 하기로 했던 것이라는 등의 주장을 하면서 “그룹사의 통상임금 판결 확정시 그 결과를 소급해 준용하겠다”고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는데, 참으로 막무가내가 아닐 수 없다. 합의서의 문구만 보더라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도 엉뚱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자니 안쓰러울 지경이다. 당시 노사협의회 회의록은 비록 현대차그룹의 타사업장에 미칠 영향을 고려한 사측의 요청에 따라 ‘비공개’ 회의록으로 작성된 것인데, 노사 대표자들이 위임한 간사들의 서명해 작성한 것이다. 합의 당시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합의를 전제로 추가적인 협의를 진행해 왔던 것으로, 이는 각종 노사협의 내지 단체교섭 등의 내용을 통해서 넉넉히 확인할 수 있다. “그룹사의 통상임금 판결 확정시 그 결과를 소급해 준용하겠다”는 이러한 노사합의를 믿고서 노동자들은 별도로 통상임금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9년 3월께 그룹사 중 기아차에서 최초로 통상임금 관련 노사합의를 했다. 이와 같이 “통상임금 관련 그룹사 합의 결과”가 나오자 이 회사 노동자들은 노동조합과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 등을 통해 노사합의 대로 사측에 이행할 것을 재촉하게 된다. 하지만 사측이 들어주지 않자 조합원들은 통상임금 소송을 제기하게 됐다. 이상과 같은 노사합의와 사측의 태도, 소송에 이르게 된 경과 등을 통해서 보면, 피고 사측이 노사합의를 통해서 “통상임금 관련 그룹사 합의 결과”를 준용해 주기로 해서 원고 노동자들은 이를 믿고서 회사(피고)를 상대로 소를 제기하지 않고서 그룹사 합의 결과가 나오기만 기다렸던 것이다. 이렇게 믿고 기다리다 임금채권의 소멸시효 3년을 도과하게 됐던 것인 바, 이러한 상태에서 채무자인 피고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해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서 피고 소멸시효 항변은 인정될 수 없다고 봐야 마땅한 것이다.

4. 노동자를 대리해서 소송을 하다 보면, 분명한 사실조차 부정하는 사용자들을 보게 된다. 노사합의를 부정하는 걸 자주 보게 된다. 노사합의를 하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어떠한 취지로 한 것인지 분명한데도 그 합의문구가 명확히 정리돼 있지 않은 것을 내세워 엉뚱한 주장을 한다. 심지어 합의문구가 명확하지 않은 것을 넘어서 사측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으로 정리돼 있는 경우까지 있는데, 이럴 때에는 사측 주장을 반박하기가 만만치 않다. 다행이 이번 현대트랜시스 통상임금 사건은 거기까지는 아니었다. 다소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현대차그룹사의 결과를 적용해 주기로 했던 것이라서 시효 도과로 소멸했다고 사측이 항변할 것은 아니다. 현대트랜시스에서 노동자들은 사측의 약속을 믿고서 기다렸던 것이고,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라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고 법적으로 비난받을 것-소멸시효 항변-은 아니다. 오늘도 우리 노동현장에서는 수많은 노사합의를 하고 있다. 사측의 약속을 믿고서 기다렸더니 노동자를 탓하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인데, 노사합의를 할 때에는 사용자의 변심까지 대비해서 작성할 필요가 있겠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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