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관홍 공인노무사(민주노총 법률원)

지난해 5월 즈음에 기사를 통해 접한 사고였다. 발레 무용수가 우울증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의 기사들을 온라인에서 봤다. 재능이 뛰어나서 장래를 촉망받는 무용수라는 평가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무슨 사정이 있었을까 잠시 궁금해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노조를 통해 상담 요청이 들어왔다. 상담자는 위 무용수의 어머님이셨다. 마음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어머님께서는 허망함을 비롯한 여러 감정이 섞인 채였다. 그래도 비교적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망인은 어려서부터 무용에 두각을 나타냈고 수많은 콩쿠르에서 상위권에 입상하며 본인의 재능을 키워 나갔다. 역대 최단신이라는 단점을 오로지 노력으로 극복하면서 예술학교 재학 시절 여러 안무가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국제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며 원하던 발레단에도 입단할 수 있었다. 망인으로서는 원하던 바를 이루고 이제 힘껏 날아오르기만 하면 되던 시기였다.

수많은 공연 일정을 소화하면서 겪은 어려움은 마땅히 이겨 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며 감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몸이 겪은 부상은 달랐다.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망인은 5~6년 동안 많은 부상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재활을 하고 다시 연습해 본인의 꿈을 향해 다가가고자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많은 곳에 나가기가 두려워졌고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는 것조차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부상 때문에 중요한 배역을 따내는 것이 어려워지고 승급에서 누락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본인의 꿈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급기야 짧은 휴가 이후 복귀를 앞두고 불안 및 우울 증상이 심해져서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병가 및 휴직을 사용하면서 수개월 간의 병원 진료 중 호전과 재발을 반복했다. 그러던 중 병가 기간이 끝나고 발레단에 복귀하기 전날, 유서를 남기고 그간의 비상을 마무리했다.

어머님께서는 처음에 사건 진행에 고민이 많으셨다. 일단은 산재 제도 자체를 잘 모르시기도 했고 사정이 어려워 착수금 또한 부담이 됐으리라 생각한다.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힘들 것이지만 무엇보다 따님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업무로 인해 이런 결과가 발생했다는 것을 인정받기만 해도 조금의 위로가 되지 않겠냐는 취지로 말씀드렸고, 장시간 설득 끝에 사건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얼마 전 산재 승인 통지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전해졌던 어머님의 떨리는 목소리는 형언할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을 느끼게 했다. ‘예술가들은 개개인의 창의적인 정신력의 소유자들이니 겨우 이런 일들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인가?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문화 전반에 얼마나 많은 예술노동자들이 관여하고 있는데 내가 알고는 있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은 왠지 다른 산재 사건들과는 그 결이 다르다고 느낀다. 정신질환 사건이 보통 그렇지만 극단적인 선택 사건은 특히 그렇다. 망인의 삶을 느껴야 한다. 이제는 본인의 말을 듣지 못해 망인의 정신상태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주변의 모든 편린을 모아 스스로 망인의 눈과 생각이 돼 과거를 되짚어야 한다. 유서, 정신과 진료기록, 본인이 작성한 메모 등이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재해경위서는 감정이입의 연속에 따른 결과물이다. 최대한의 사실을 근거로 망인의 심리상태 변화를 적절하게 구성해서 읽는 이로 하여금 ‘그래 이런 상황이면 그럴 만하다’라는 당위를 얻어 내는 것은 비단 이번 사건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 이런 상황이면 그럴 만하다’라는 것에 대해 사회가 보듬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지 않을까?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떨쳐 내는 것, 그리고 오롯이 어떠한 재해자든 그 재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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