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혜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

올해 초부터 불거진 업무상질병 처리기간의 장기화 문제가 여전히 심각하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등 노동·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지난 4일 “산재보험 선보장제를 도입하자”는 기자회견을 열고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의 핵심은 신속한 재해조사를 위해 재해조사 기간과 절차를 법적으로 규정하고, 재해조사 기간을 넘기고도 승인 여부를 결론 내리지 못한 경우 국가 책임 아래 근로복지사업의 일환으로 재정을 마련해 산재보험을 우선 적용하자는 것이다. 업무상질병의 처리기간 지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업무와의 인과관계에 대해 심층적이고 전문적인 조사를 하고 판단을 내리는 역학조사다. 업무상질병 역학조사를 수행하는 기관은 내부지침으로 180일 내 역학조사 결과를 심의·의결할 것을 정하고 있지만 현실과 괴리가 크다.

올해 초 우원식 의원실에서 공개한 ‘180일 초과 역학조사’ 명단을 보면 지난 1월31일 기준 모두 574명으로 평균 466.4일 동안 역학조사 결과를 받아보지 못했고 최대 6년이 걸린 사람도 있었다.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고 반드시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번에 발의된 개정안처럼 조사를 하더라도 늦어지면 일단 먼저 보장해서 재해자의 고통을 줄이자는 제안은 사회안전망으로서의 산재보험 취지에 부합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해명도 필요하다. 표면적인 이유는 처리해야 할 신청은 계속 느는데 조사할 인력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청을 줄일 수도 없고 전문 인력을 갑자기 늘리기도 어려우니 해결이 요원해 보인다. 그런데 과연 업무상질병을 결정하는 데 이런 공들인 조사와 판정이 꼭 필요한 것일까? 질병은 사고보다 업무와 관련성을 평가하는 것이 간단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대부분 질병이 ‘직업병’과 ‘직업병 아님’의 이분법적 구분보다는 그 중간 어딘가에 있기에 각 사례마다 여러 요인들을 고려해 어느 한쪽으로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다. 우리 사회에서 업무상질병 조사와 판정에 소모되는 전문가의 노력은 어마어마하다. 필자도 직업환경의학전문의로서 업무상질병 역학조사를 주업무로 수행한 적도 있고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위원, 산재심사실 자문의, 업무상질병자문위원회 자문의 등 벌써 여러 이름으로 관여한 경험이 있는데 이 외에도 훨씬 더 많은 전문가들을 위한 ‘자리’와 ‘역할’이 정해져 있을 정도다. 이렇게 업무상질병 결정에 에너지를 쏟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산재로 인정받을 때와 인정받지 못할 때 재해자의 보상 수준에 너무나 큰 차이가 나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한 사람의, 또는 한 가족의 생계가 걸린 문제니 이 결정 자체를 위해 엄청난 인력과 비용을 쓰는 것이다. 국가에서 쓰는 비용 외에도 재해자가 공인노무사나 변호사 등에 지불하는 사적 영역에서의 지불하는 비용과 무엇보다도 이 판단을 받기까지의 재해자 고통을 모두 합친다면 결국 가장 피해자는 아픈 노동자가 될 것이다. 만약 산재보상을 받지 않더라도 충분히 치료받을 수 있고 사회적 안전망이 보장된다면 업무상질병 인정을 둘러싼 과도한 긴장을 풀고 자원과 인력을 훨씬 유용한 곳에 쓸 수 있지 않을까.

산재보험의 선구자인 독일에서는 ‘급여계속지급법’이라는 법에 따라 노동자는 질병으로 노동불능(일 할 수 없게 됨) 발생 시 최대 6주까지 사업주로부터 급여계속지급 청구권을 갖게 되는데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유급병가’라 할 수 있다. 상당수의 질병이 이 기간 내 치료되고 그 이후까지 노동이 어려운 경우 업무상질병은 산재보험으로, 업무 외 질병은 상병수당으로 일하지 못해서 손실되는 소득을 어느 정도 보전받게 된다. 우리도 독일처럼 유급병가와 상병수당으로 보편적인 보장을 충분한 수준으로 갖춘다면 지금까지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업무상질병을 빠르고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 적용하는 것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역학조사는 산재인정과 꼭 연계하지 않더라도 직업병 예방을 위해 필요한 사례를 충분한 시간을 들여 조사한다면 훨씬 유용한 지식의 축적이 될 수 있다. 직업병이든 아니든, 산재 인정을 받든 못 받든, 아픈 노동자가 걱정 없이 치료받고 건강하게 업무에 복귀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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