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대리운전하는 게 되게 좋아요. 행복하고 적성에도 잘 맞고, 운전을 좋아하니깐요.”

대리운전기사로 20년 가까이 일한 정민지(가명·53)씨의 목소리가 경쾌했다. 전단지를 뿌려 고객을 모으던 시절 처음 대리운전 일을 시작했다. 처음 고객을 태우고 이동한 경로는 안양 범계에서 서울 강남까지 5만원의 일당을 받았다. 돈이 될 것 같아 일을 시작했다. 여성기사가 지금보다도 드문 시절이지만 적성에 맞아 계속 일했고 이제는 천직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기사로 일한다고 생각하지 ‘여성기사’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깐 남성기사와 차이를 두고 일하지 않아요.”

하지만 일에 대한 정민지씨의 신념은 곧잘 성차별의 높은 장벽에 짓눌린다. 일부 대리운전업체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배차를 제한한다. 배차 제한은 일감을 얻을 기회의 박탈, 소득감소로 이어진다. 하지만 대리운전기사의 배차 차별 문제는 정확한 실태도 파악되지 않는 상황이다. 특수고용직인 대리운전기사 앞에서 고용상 성차별을 금지하는 각종 제도들도 무력하다.

여성기사 뽑아 놓고 배차차별
“왜 여성으로 태어났을까” 자책

“하루에 몇 번씩 배차가 취소되면 난 왜 여성으로 태어났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미 대리운전업체에서 뽑아 놓고 일하고 있는데 무슨 문제를 제기하면 ‘여성기사 없앨 거예요’라고 하고요.”

정민지씨는 법인과 계약을 맺고 대리운전콜을 중개하는 업체(법인 대리운전업체) 소속으로 일한다. 차별은 일상이다. 콜을 클릭하면 ‘남성기사 전용 콜입니다’라는 메시지가 뜬다. 여성기사는 수행할 수 없는 콜이다.

콜을 클릭해 잡으면 콜을 중개하는 대리운전업체(콜센터)에서 전화를 걸어 “(여성기사도 괜찮은지) 고객에게 물어본 뒤 다시 전화드리겠다”는 말을 듣는 것도 부지기수다. 정씨를 포함한 여성기사들은 대리운전업체들의 자체 지침이 있다고 짐작한다.

문제를 제기한 뒤 돌아오는 말은 더 납득하기 힘들다. 정씨는 “이 회사(대기업 등 콜센터와 계약한 법인 고객을 지칭)는 ‘특별 관리고객이라서, 전무님(고위 임원)이라서 안 돼요’라고 말한다”며 “그렇게 하루에 배차 4건이 취소돼서 콜센터에 항의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10년째 대리운전을 하는 고정복(58·가명)씨도 “며칠 전에도 콜을 잡았는데 계속 로딩 중으로 떴다”며 “콜을 줄지, 안 줄지 상황실에서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성기사에 대한) 손님들의 인식은 많이 좋아졌는데 업체에서 여성기사를 대하는 것이 문제”라고 덧붙였다.

▲ 제보자 제공

‘일일기사 콜’ 단가 오르자 여성기사는 ‘팽’

2020년 국토교통부가 연구용역을 맡견 한국교통안전공단에서 수행한 ‘대리운전기사 실태조사 및 정책연구’를 보면 대리운전기사 1인당 평균 운행횟수는 5.4회다. 여성기사가 배차 제약으로 남성기사보다 운행을 한 번만 덜 해도 임금이 20% 감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성기사들은 고객이 원해서 여성기사를 배차에서 제외하는 경우보다 대리운전업체가 혹여나 있을 고객의 불평을 우려해 차별배차를 한다고 본다. 대기업과 월간 계약을 맺는 법인 대리운전업체의 경우 다른 업체와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다. 일반 대리운전업체 소속으로 일하는 김정자(가명·69)씨는 일반콜 업체도 고객이 문제제기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배차차별이 이뤄진다고 강조했다.

노동시장에서 여성에게 저임금, 질 낮은 일자리가 집중되듯 여성 대리운전기사는 좋은 콜을 잡기 힘든 게 현실이라고 기사들은 증언한다. 정민지씨는 “과거 ‘일일기사 콜’의 단가가 낮을 때는 콜센터에서 여성기사에게 사정해 가 달라고 했는데 콜 단가가 오르니 이제 여성기사들을 배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일기사는 고객의 하루 일정에 동행하는 기사를 뜻한다. 대기시간도 노동으로 보고 시간당 임금을 지급하는데 최근에는 평균 6시간 기준 11만원을 지급한다. 이 중 수수료 20%를 제외한 금액이 기사 몫이다. 시간당 1만원이던 시절보다 2배 가까이 올랐다.

여성기사가 적다는 이유로 대리운전기사의 성차별 문제는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대리운전기사의 남녀 비율을 확인할 수 있는 연구는 2013년에 멈춰져 있다. 국토교통부가 이듬해 펴낸 ‘자가용 자동차 대리운전 실태조사 및 정책연구’에 따르면 2013년 기준 실태조사 응답자 700명 중 여성 대리운전기사는 35명으로 5%였다.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남녀고용평등법도 비껴 가는 특수고용직

특수고용직이 경험하는 성차별을 명확히 규율하는 법이 없는 것도 문제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 2조는 차별을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성별을 이유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채용 또는 근로조건을 다르게 하거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취하는 경우”로 규정한다. 다만 특수고용직인 대리운전기사에게 직접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이견이 있다. 해당법은 근로자를 “사업주에게 고용된 사람과 취업할 의사를 가진 사람”으로 정의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보다 넓게 해석할 수 있지만, 통상 사업주에 고용돼 근로자성을 인정받는 경우 적용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수고용직인 대리운전기사를 남녀고용평등법상 근로자로 볼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현재 고용노동부는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해석하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 남녀고용평등법의 적극적 적용 혹은 개정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김세희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는 “여성고객이 남성운전자에게 공포를 느낄 수 있는 경우처럼 성별로 전용 콜을 운영하는 목적에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며 “고객이 요청한다 해도 남녀 차별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고 비판했다. 김 변호사는 “특수고용직을 노동관계법 영역 안에 포함시키거나 더 폭넓게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대안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은정 인제대 교수(법학) “남녀고용평등법상 근로자는 반드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취업의사를 가진 사람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며 “사업주가 고객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임의로 여성기사에 배차 차별을 한다면 남녀고용평등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노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차별금지법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라며 “기사가 여성임을 밝힐 이유가 없는데, 성별을 고지하는 대리운전업체에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다. 배 대표는 “기사가 남자 혹은 여자여도 괜찮냐고 묻는 것 자체가 차별이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진정을 통해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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