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혜경 노동법 박사

철도노조의 합법화 투쟁

철도노조 합법화 투쟁에서 쟁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철도노조 합법화 투쟁의 해결이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적 지시에 따른 결과였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철도노조 합법성을 인정한 것은 어떤 법률적 근거나 법률의 합리적 해석에 따라 노동조합의 합법성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이승만 개인의 시혜적 조치였을 뿐이다. 이승만은 “반공에 공이 큰 철도노조는 공무원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을 지속할 수 있다”며 시혜적으로 철도노조를 인정했다.

둘째, 당시 국가공무원법은 “공무원은 정치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며 공무 외 일을 위한 집단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했지만 일반직에 국한하고 별정직 공무원에 적용하지 않았다. 별정직에 해당하는 공무원으로는 법관, 교원, 비서 등과 함께 ‘단순한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도 포함하고 있다.

문제는 ‘단순한 노무에 종사’하는 범위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공무원이라는 신분을 이유로 구체적으로 어떤 직무에 종사하느냐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률적이고 전면적으로 노동 3권을 제한한 것은 분명한 단결권 침해행위다.

당시 국가공무원법상 공무원에 대한 노동 3권 금지 규정을 전제해서 평가하더라도, 국가공무원법 예외로서 노동 3권이 인정되는 ‘단순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 범위는 단결권의 취지상 넓게 해석돼야 한다. 특히나 철도노동자처럼 작업현장에서 근로를 제공하는 하부 종업원들은 당연히 단결권의 주체로서 합법적으로 노동조합을 조직할 수 있다. 따라서 철도노조의 합법화투쟁은 정당했다.

조선전업 노조결성투쟁

조선전업노조 결성투쟁의 쟁점은 귀속사업체 단결권에 대한 인정 여부, 중앙노동조정위원회의 판정에 대한 법적 효력 여부, 이승만 개입에 의한 쟁의 종결의 문제로 집약된다.

첫째, 귀속사업체인 조선전업은 준공무원에 해당해 단결권 주체가 될 수 없어 노동조합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귀속사업체의 종업원은 준공무원이라는 것은 어떤 법적인 근거도 없다. 귀속사업체인 조선전업의 노조결성은 타당하다.

둘째, 조선전업 노조 간부에 대한 전직과 해고처분은 노조를 파괴하는 것이므로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는 중앙노동조정위 판정에 회사측은 법적 효력이 없음을 주장하며 불복한다. 노조는 이런 사측에 대항해 파업을 벌였다.

중앙노동조정위 판정은 법적 효력을 가진다. 당시 집단적 노사관계 부문은 노동법이 제정돼 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미군정의 노동관계법령(법령 19호2조, 법령 97호)이 법적 효력을 가지기 때문에 회사측은 중앙노동조정위 판정에 따라야 한다. 사측이 중앙노동조정위 판정의 효력을 부정하고 노조측에 대항한 것은 명백히 부당하다.

셋째, 이승만 개입으로 쟁의가 종결됐다. 노조 활동의 자주성에 반한다. 철도노조 합법화투쟁과 마찬가지로 조선전업노조 결성투쟁도 이승만 개입으로 노조가 인정된다. 노사의 자주적 해결이 아닌 제3자에 의한 외부적 개입으로서 강권에 의해 노동쟁의가 해결된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단결권의 자주적 정신에 반한다.

조선방직 노동쟁의

조선방직에서 일하는 노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방직에서 일하는 노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방직은 8·15 이전에는 일본인 소유였다. 부산과 대구의 두 곳에 공장을 가진 대규모의 정부 귀속기업체로 국내 방직물 대부분을 생산하는 가장 중요한 공장의 하나였다.

이승만 비호 속에 새로 취임한 강일매 사장은 본사와 공장을 분리시킨다는 구실로 근로자 120명을 신규채용한 다음 20년 이상 근무하던 60세 이상의 숙련공 20명을 해고했을 뿐만 아니라 노골적인 노조탄압 정책을 쓰면서 노조 간부 등을 해고했다. 노동자들이 폭발해 1951년 12월15일 “폭군 강일매는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를 거는 등 대항한다.

조선방직 쟁의의 쟁점은 세 가지다.

첫째, 조선방직 쟁의는 1950년 한국전쟁 중, 특히나 계엄령 속에서 진행됐다. 악조건 속에서도 6천여명의 노동자가 총파업을 단행하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강일매 사장 퇴진을 주장하는 등의 치열한 싸움을 전개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조선방직 쟁의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가장 치열한 쟁의행위로 평가된다.

둘째, 강일매 조선방직 사장이 애초에 이승만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 취임했지만, 당시 대한노총 지도부가 이승만과 관련된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이승만과 결합해 조선방직 쟁의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단적으로 조선방직 쟁의대책위원회를 지도하던 전진한이 총파업 하루 만에 조합원들의 의견은 묻지도 않은 채 파업 종료를 선언함으로써 이승만과 타협해 버렸다. 전진한이 쟁의의 결정적 순간에 쟁의의 실질적 지도부와 달리 독자적으로 파업중지를 선언한 이유는 이승만과의 협조적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재편 중인 대한노총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조선방직이 총파업 단행을 선포한 날 “단순한 생산발전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고용해다가 맡길 터이니 일하고 싶은 사람은 이 주장 밑에서 일해야 될 것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 내보내고 달리 조직할 것이니, 못 알아듣고 공연한 시비를 일으키려고 할 터이면 다 불리할 것이니 나의 의도를 양해해서 실행해야 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결국 전진한은 이승만과의 협조노선을 통해 대한노총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셋째, 노동관계법이 제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조선방직 쟁의와 같은 대규모의 투쟁은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도 격렬하게 전개됐고, 당시 노동관계법의 제정에 많은 힘을 실어 줬다.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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