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 실장

윤석열식 부자감세의 후폭풍이 거세다. 감세 탓에 세수가 줄어 마른 수건 쥐어짜듯 세출을 삭감할 판이다. 이 와중에 집권 여당 과학기술특별위원회(과기특위)는 급증한 연구개발(R&D) 예산을 노리고 편법으로 연구과제를 따낸 기업이 많다고 주장했다. 예부터 R&D 예산은 ‘눈먼 돈이라 먼저 먹는 놈이 임자’라는 소리가 공공연했다. 그렇다고 R&D 대폭 삭감 카드를 내밀면 하수 중의 하수다. 그 하수 짓을 윤석열 정부가 하고 있다.

한국일보는 9월13일 국민의힘 과기특위 발표를 꼼꼼하게 취재해 1면 머리기사에 이어 2면을 전부 털어 보도했다.(1면 “‘화장품 연구’ 가구업체가 수억 R&D 예산 축냈다”, 2면 “‘과기부 지침’ 두 달도 안 돼 … 3.5배 불어난 글로벌 R&D 예산”) 먼저 기사는 R&D 낭비 실태를 고발했다.

기사에 나오는 첫 사례는 연 매출 5억원도 안 되는 코딱지 만한 가구 제조사가 2020년 수억 원짜리 R&D 예산을 따냈고, 연구주제는 가구와 일도 관련 없는 ‘기능성 화장품 개발’이었다. 세 번째 사례도 충격이다. 한 중소제조업체가 2020년 R&D 사업 1억원을 따냈는데, 이 업체가 낸 과제계획서는 브로커가 2천만원을 받고 대신 써 줬다.

R&D 수행능력 없이도 ‘R&D 기획 브로커’를 대필작가로 내세워 예산만 축낸다. 세금 도둑질이다. 브로커들은 연구기획 및 과제 관리업체(기획업체)에 숨어 난립했다. 신고한 기획업체는 668곳인데 미신고 업체는 1만개에 달한다. 신고한 668개 업체 가운데 박사급이 없는 곳이 404개(60.5%)나 된다. 석사급조차 없는 업체도 104개(15.6%)에 달한다. 기획업체는 따낸 연구비를 나눠 먹으며 공생한다.

공교롭게도 국민의힘 과기특위가 소개한 R&D 예산낭비 사례는 대부분 문재인 정부 때다. R&D 사업의 중복 또는 부실은 30여년째 되돌이표다. 해묵은 과제다. 정부는 전문성이 없어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예산을 집행하고 정부로부터 R&D 사업을 관리 평가하라고 돈 받은 연구관리 전문기관도 제구실을 못했다.

‘기승전 문재인 정부 탓’이라는 윤석열 정부는 R&D 예산 부실도 전 정권 부조리로 치부할 태세다. 당연히 대규모 R&D 예산삭감이란 단순 처방을 앞세운다.

한국일보는 국민의힘 과기특위 발표를 근거로 취재를 시작했지만 국민의힘이 짜놓은 프레임에 걸리지 않고 다각도로 문제점을 짚었다. 한국일보는 9월13일 1면 머리기사에서 “(R&D 대규모 삭감은) 관료들이 자기 책임을 연구현장으로 떠넘겼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결론 내렸다.

정부는 부실 의혹에 당장 정부출연 연구기관 25곳의 주요 사업비를 평균 25%씩 깎는 매우 손쉬운 채찍을 구사했다. 한국일보는 “기초과학은 말살당하고 있다”는 연구현장의 목소리를 담았다.

한국일보는 9월23일 1면과 2면에서도 현장 연구자들의 목소리를 담아 정부의 편의주의 행정을 비판했다. 정부출연 연구기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하는 한 과학자는 한국일보에 “연구비 삭감에 따른 예산부족으로 금년까지 하고 나가 주면 좋겠다는 얘길 들었다”며 분노했다. 한국일보는 이를 9월23일 1면에 “R&D 예산 삭감에 속 끓는 과학도들 … ‘의대 안 간 게 후회스럽다’”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한국일보는 두 거대 정당이 집권할 때마다 시소게임하듯 과학계를 흔들 게 아니라 “국가 R&D 체계를 재정비해 기초연구 투자를 꾸준히 이어 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념과 철학, 가치관에서 별로 다르지도 않은 두 거대 정당이 서로 죽일 듯 싸우는 정국에서 균형 잃지 않고 보도하기란 쉽지 않다. 한국일보의 R&D 예산삭감 관련 기사가 곧 닥쳐올 예산 정국에 바람직한 바로미터가 되길 바란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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