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상철(노무법인필·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회의에 참석할 때 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 모두 마음이 무겁다. 누가 봐도 인정할 사건, 누가 봐도 불인정할 사건은 굳이 파고들지 않는다. 그러나 업무상 재해 인정기준에 다소 미치지 못해도 업무 관련성을 주장할 요인들이 있는 경우 “자료 검토가 부족해서 놓친 건 아닌가”하는 자책을 하지 않기 위해 자료를 꼼꼼하게 살피는 편이다. 다른 심의위원들의 의학적 견해에 맞설 힘은 각 사건의 업무적 요인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래야만 논의라도 해 볼 수 있다. 과거 ‘사인미상’이라는 이유만으로 질병판정위에서 업무 관련성조차 논의하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뇌혈관질병·심장질병 업무상 질병조사 및 판정지침’의 “사인미상·청장년급사증후군·심장정지·심폐정지·돌연사(급사), 부검하지 않더라도 다른 질병이나 손상 등에 의한 심폐정지나 심장정지가 아닌 경우는 일반적으로 심장의 문제(급성심근경색, 부정맥 등)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사망 당시의 정황 등을 참작해 업무상 사유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조사한다”는 규정에 따라 ‘사인미상’ 사건에 폭넓게 접근하는 추세다.

주차요금 정산업무를 하던 60대 남성이 사인미상으로 사망한 사건도 질병판정위에서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24시간 교대제 근무라는 업무부담 가중요인이 있지만 발병 전 12주 동안 업무시간이 51시간20분으로 만성적 부담 기준에 다소 미치지 못하고, 사인미상이라는 점에서 사건 진행 여부를 판단할 때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근로복지공단은 조사 과정에서 사인미상 상병확인 자문 회신을 통해 “위험요인이 확인되는 점, 과거 림프종 병력 있으나 최종 관해(일시적이건 영속적이건 자·타각적 증상이 감소된 상태) 판정을 받은 점 등을 종합할 때, 심혈관질병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된다고 봤다. 그리고 심의회의를 통해 “고인의 경우 주당 업무시간이 1주 44시간, 4주 평균 49시간30분, 12주 평균 51시간20분으로 단기간 업무부담요인 증가나 만성과로를 인정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나, 발병 당일 한파주의보에 의한 추운 날씨, 교대제 근무 등의 업무부담 가중요인이 확인되고, 개인적인 소인으로 고혈압, 당뇨에 대한 진료이력 등을 고려할 때, 업무적인 요인에 의해 기존 질환이 악화되어 사망에 이른 것으로 판단되므로 업무와 상병 간 상당인과관계가 인정”했다.<근로복지공단, 2023년 2분기 업무상질병 판정사례(2023. 9.)>

질병판정위에서 인정되지 않았지만 재심사청구를 통해 산재로 승인된 사례도 있다. 제품 운반 및 적재 업무를 하던 50대 남성의 사인미상 사건이다. 공단은 사인미상 상병확인 자문회신을 통해 “사망 당시 명확하지 않으나 최근 흉통 및 호흡곤란을 호소했다는 경찰조사 내용, 복부비만, 음주 및 흡연력 등 심혈관 질병 위험요인 확인된 점 등을 종합할 때, 심혈관질병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된다며 급성심장사(추정)로 봤다. 질병판정위에서는 “업무요인보다 개인요인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발병 또는 악화된 것으로 판단되므로 신청 상병과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재심사청구를 통해 “원처분기관의 조사에서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재해근로자 발병 전 업무시간이 비록 인정기준에는 미달하나, 재해근로자의 연가 사용으로 일시적으로 업무시간이 줄어든 것이고, 해당 기간을 제외하면 평균 1주 업무시간은 53시간 내외로 확인된다. 재해근로자의 업무강도 및 기간, 고정 야간 근무와 소음 노출 등과 같은 근무환경을 고려하여 종합해 볼 때,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요인이 매워 컸다고 판단되는 바, 재해근로자 사망과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했다.<근로복지공단, 2023년 1분기 업무상질병 판정사례(2023. 6.)>

사인미상 사건과 업무 관련성을 인정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인미상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계로 볼 것이 아니라 재해자의 업무강도, 시간, 근무환경 등 업무상 과로 및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위험요인을 샅샅이 살펴 업무 관련성을 주장한다면 사인미상 사건이라도 충분히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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