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올림

삼성전자 기흥연구소에서 17년 동안 일하던 최진경(49)씨는 2018년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았다. LCD용 핵심 소재인 감광재 개발업무를 하던 최씨가 여러 화학물질을 직접 손으로 다룬 시간만 6년, 별다른 안전조치는 없었다. 업무상 질병이 의심됐다. 이듬해 3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지만 역학조사, 판정위원회를 거쳐 4년 만에 나온 결론은 ‘불승인’ 판정이었다. 현재 그는 재심의(산재심사청구)를 준비 중이다.

최씨처럼 산재를 신청했지만 역학조사 기간 건강이 악화하거나, 역학조사 결과를 듣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개정을 통한 산재보험 선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27일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산재 국가책임 법제화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역학조사 기다리다 죽어가는 노동자”

우원식 의원과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등 노동·시민사회단체가 4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산재보험 선보장제를 도입해 산재 인정에 대한 국가책임제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엄격한 역학조사 절차를 거쳐 산재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시스템에서 산재 처리 지연 문제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피해는 오롯이 재해자 몫이다. 반올림에 따르면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산재 보상을 신청하고 역학조사 결과를 기다리다 숨진 노동자만 111명에 달한다.

개정안의 핵심 내용은 신속한 재해조사를 위해 재해조사 기간과 절차를 법적으로 규정하고, 재해조사 기간을 도과하고도 승인 여부를 결론 내리지 못한 경우 국가 책임 아래 근로복지사업의 일환으로 재정을 마련해 산재보험을 우선 적용하도록 한 것이다. 원인불명의 희귀질환이나 업무와 재해 사이 인과관계에 대한 의학·과학적 연구가 미흡한 경우도 선보장을 적용한다.

이 외에도 △의료인과 행정기관이 직권 개입 허용 △업무상 재해의 상당인과관계에 대한 사회적 규범 인정 적용의 원칙 명문화 △산재 국가통계 공시제 등을 담았다. 산재 재해자나 유족이 직접 신청하는 현행 제도는 인식이 부재하거나 취업 중 고용상 불이익을 우려해 신청이 어렵다는 지적을 반영했다.

독일·일본은 이미 시행
2006년 선보장 취지 담은 노사정 합의도

삼성전자 LCD 사업부에서 일하다 뇌종양이 걸린 뒤 14년 만에 산재를 인정받은 한혜경씨의 어머니 김시녀씨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혜경이는 2009년에 산재신청을 했는데, 6번의 불승인 끝에 2019년 인정됐다”며 “사회보험은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인 만큼 경제적 고통을 줄이도록 신속하게 처리돼야 한다”고 호소했다.

산재 선보장 제도는 노동계의 오랜 숙원이자, 실현하지 못한 노사정 합의사항이다. 2006년 노사정은 산재보험 제도개선에 관한 노사정 합의문을 채택하고 “요양승인 전 건강보험 우선 처리”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불가능한 제도도 아니다. 독일은 업무상 부상과 질병에 대한 병원 치료시 재해보험을 우선 적용한다. 이후 직업보험협회(민간부문의 경우)에서 산재 여부를 심의한다. 산재로 불승인되더라도 건강보험에서 치료비가 지급된다. 일본도 산재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노동기준감독서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노재보험 지정의료기관은 노동자에게 의료비를 청구하지 않는다. 이후 산재가 불승인될 경우 재해자 본인은 국민건강보험료 자부담금 30%만 부담하면 된다.

우원식 의원은 “산재 노동자가 스스로 산재를 입증하고 기약 없는 역학조사를 기다리가 죽어가는 시스템은 정상적인 국가제도가 아니다”라며 “이번 개정안을 통해 역학조사 장기화 문제를 해결하고 산재만큼은 국가의 역할을 충실히 다하는 산재 국가책임제로 대대적인 혁신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