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혜경 노동법 박사

이승만 정권 시기의 노동운동과 노동법 평가에서 이승만 정권기에 일어난 1950년 한국전쟁의 의미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문제는 이승만 정권에게 ‘한국전쟁’이란 어떤 정치적 의미인가의 문제인데 두 가지의 의미를 함축한다고 생각한다.

위기에 직면한 이승만 정권이 꺼낸 카드

하나는 이승만과 친일·보수지배 권력의 ‘위기’로서의 정치적 의미이다. 한국전쟁시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에 대응할 주체적 힘이 전혀 없었다. 전쟁시 위험을 그대로 국민에게 방치한 채 자기만 서울을 탈출했다. 이후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워 ‘보도연맹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양민학살 사건’ 등을 일으키면서 대다수 국민을 향한 비인간적이고 조직적인 학살을 저지른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북한에 밀려 후퇴할 당시 젊은 남자들을 의용군으로 빼앗겼던 전쟁 초기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수십만 명에 이르는 청장년을 남쪽으로 후송하려는 계획을 말한다. 이승만은 1950년 12월15일 국민방위군 설치 법안을 국회에 상정해 12월10일 국회를 통과한 법안을 즉시 공포한다. 법안의 주요내용은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 장정은 제2국민병에 편입하고 제2국민병 중 학생을 제외한 자는 지원에 따라 국민방위군에 편입시키며 육군참모총장은 국방장관의 지시를 받아 국민방위군을 지휘·감독하는 것이다.

12월17일 서울에서 첫 남하부대를 편성해 후송업무에 들어간 방위군사령부는 경기, 강원, 충청, 전라도 일대에 부대를 편성했다. 경남·경북 일대에 설치한 교육대를 향해 도보행군에 들어가지만 예산이나 장비 지원 없이 강행된 행군에다가 정부가 급하게 마련해 준 양곡권(인솔 책임자가 남하하면서 현지의 군수나 서장에게 급식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마저도 협조가 불가능해지면서 결국 이 대열은 ‘죽음의 행진’이 됐다. 국민방위군은 군대이지만 명부도, 군번도, 무기도, 군복도 없는 부대였다. 9만명 가량의 군인이 동사·아사·병사한 조직적 반인권적 사건이다.

거창양민학살 사건은 1951년 2월 산세가 험해서 작전을 수행하기 쉽지 않았던 지리산 자락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일선 지휘관이 일반 민간 주민들을 공비와 내통한다는 이유로 지역주민 대부분을 집단학살한 사건이다.

지역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2월9일 거창읍에서 신원면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마을인 덕산리 주민 80여명이 청연골에서, 다음날인 2월10일에는 와룡리, 대현리, 중유리 주민 1백명이 탄량골에서 학살됐으며 2월11일에는 그 전부터 신원국민학교에 집결해 놓았던 신원면 일대 주민 가운데 5백여명이 학살됐다고 한다. 2월9~11일 학살된 신원면 일대 주민 중 절반 이상이 노인과 어린아이라는데, 과연 젖먹이와 어린아이들이 통비 행위를 할 수 있는 인지능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결국 거창양민학살 사건은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갖는 국가에 의한 조직적인 학살임을 보여준다.

‘대량학살’이란 정당한 법적 절차나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국가권력이나 그와 연관된 권력체가 정치적 이유로 자신과 적대하는 비무장 민간인 집단을 일방적·의도적으로 살해하는 것으로서 전쟁 중이라도 정당화할 수 없다. 국가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대량학살 만행 속에서 다수 국민은 권력집단에 대항·대립하는 반이승만 세력이 됐다. 이에 힘입어 국회에서 다수의 ‘반이승만 전선’이 형성된 것은 ‘위기’로서 정치적 의미가 있다.

한편 한국전쟁은 전쟁이라는 비상상황과 냉전에 기반한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해 이승만 정권의 개인 지배권력과 장기집권을 위한 발판이 된다. 이승만은 국내에서 허약한 집권 기반을 반공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물리적 전쟁으로 돌파해 나갈 수 있었다. 따라서 국회에서 다수의 반이승만 전선의 형성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전쟁이라는 비상상황에 기반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물리적 압력으로 통과시키면서 재집권에 성공, 계속 그의 개인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노동운동과 노동입법

이러한 이중적인 정치적 의미 속에서 이승만 정권 시기 노동운동과 노동법에 대한 평가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이승만은 대한노총 상층 지도부를 그의 ‘정치부대화’ 했다. 그들을 통해 다수의 노동대중을 집권 확보를 위한 국민동원에 연결시키고 철저히 그의 권력 획득의 수단으로 만들었다.

둘째 1948년 단독정부 수립 후 주요한 노동운동이었던 철도노조 합법화 투쟁, 조선전업노조(현 전력노조) 결성 투쟁, 조선방직 쟁의 해결 과정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이 자주·민주적으로 사용자에 맞서 투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이 외부에서 쟁의에 개입해 쟁의를 종결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노조 활동의 본질인 자주성과 민주성을 훼손하고 이런 한계는 이후 남한 노조 활동의 보수성(한계)으로 고착돼 갔다.

이승만 정권은 철도노조의 합법화 투쟁에서 어떤 법률적 근거도 없이 “반공에 공이 큰 철도노조는 공무원임에도 노동운동을 지속할 수 있다”며 ‘이승만 시혜’를 통한 노조 합법화를 가능하게 했다. 조선전업(현 한국전력공사)이 중앙노동위원회 결정을 따르지 않고 판정 무효를 주장하자 노조가 파업을 벌인 사건에도 이승만 정권이 외부개입으로 해결했다. 귀속기업체도 단결권을 인정하고 노조 간부 복직도 인정하면서 쟁의가 해결되는 등 비자주적 태도로 일관했다.

셋째 이승만은 한국전쟁 동안 자행된 대량 조직·집단적 민간학살과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한 물리적 압력에 의한 대통령 직선개헌 통과로부터 발생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53년 3월8일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을 제정·공포했다. 1953년 집단적 노동관계법의 제정과정에서 대한노총 주류파인 전진한 의원의 노력 등이 그 배경에 존재한다. 당시 전개된 ‘조선방직쟁의’가 단독정부 수립 이후 가장 치열한 투쟁으로 입법에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단순히 이런 상황적 요인만으로 노동입법의 배경을 평가할 수는 없다.

노동입법 배경은 1945년 8월15일 일본 패전, 단독정부 수립, 한국전쟁이란 연속된 흐름 속에서 총체적 평가의 결과로 바라봐야만 한다. 다시 말해 8년간 과정에서 나타난 ‘총제적 체제 위기감’ 속에서 평가해야만 한다. 위기감을 극복하고 다수 노동대중을 국민으로 포섭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결국 1953년 제정된 집단적 노동관계법은 체제를 이탈할 가능성이 있는 노동대중들을 체제 안으로 포섭하려 한 ‘체제 안정화 장치’ 결과물로 봐야 한다.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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