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그게 바다 괴물이었구나

고교 시절 늑대처럼 서로 물고 뜯는 자연상태를 넘어서기 위해 국가를 만들었다고 배웠다. 홉스라는 학자는 국가를 리바이어던에 비유했다. 리바이어던이 뭔지 사회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것 같은데 가물가물했다. 나중에야 바다 괴물이란 걸 알았다. 질서와 평화를 준다는 국가를 왜 괴물에 비유했을까.

그걸 깨우친 곳은 교실이 아닌 현실이었다. 초등학교에 등교할 때마다 손을 가슴에 얹고 태극기를 향해 충성을 맹세했다. 반공 궐기대회에 동원된 우리는 “무찌르자 공산당, 찢어 죽이자 김일성”을 외쳤다. 독재가 뭔지 모르고 추앙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죽자 엄청 슬펐다. 충성을 바쳐야 할 국가가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것은 광주항쟁을 거치면서다. 국가가 형제자매를 총칼로 쏘고 찔러 죽인 충격을 받고 충성을 바칠 수 없었다.

국가는 때때로 괴물이 된다. 인류를 전쟁으로 내모는 파시즘이나 전체주의 국가가 그랬고 시민을 총칼로 짓밟은 군사독재가 그랬다. 국가가 뭐길래 이 모양인가를 파고드니 복잡했다. 괴물 국가가 아니라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자유와 평등과 평화가 넘치는 나라를 갈망했다.

다시 괴물이 되나

입대해 다분히 이념적인 ‘복무신조’를 외우며 군대는 누구의 것인지 생각했다. 국군을 ‘국가의 군대’로 보면 국가를 장악한 전두환 명령에 따라 시민을 죽인 일이 또 벌어질 것이다. 국군이 ‘국민의 군대’라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다. 진보 시민이든 보수 시민이든 가리지 않고 지켜야 한다. 북한은 여전히 주적일까를 얘기했다. 그렇다면 북한과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사람은 적이다. 김일성을 만나려 했던 노태우와 김영삼은 물론 그 이후 김정일을 만난 김대중과 노무현, 김정은을 만난 문재인과 트럼프도 쏴 죽일 적일까.

21세기에 들어서자 역사투쟁이 등장했다. 전향한 운동권이 뉴라이트의 선봉에 섰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국가 정통성을 한참 과거로 끌고 가려 하더니 지금은 윤석열 정부가 그런다. 국민을 통합시킬 상상력은 부족하고 집권 기반은 초라하니 엉뚱하게 과거를 끌어대 편을 가른다. 옹색하다. 일제시대 민족주의자든 자유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핍박받는 동포를 지키려 애썼다면 다 고마운 조상이 아닌가.

동의할 만한 가치를 만들지 못하며 서로 반대하는 ‘부정경쟁’은 엉뚱한 주제, 과도한 논쟁, 소모적 결과로 상태를 악화시킨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양비론이나 냉소를 쏟아내는 것도 도움이 안 된다. ‘부정경쟁’을 넘어 가치와 비전을 창출하는 ‘긍정연대’를 생각하자. 국가든 정치든 목표가 무엇인가. 국가권력 강화인가, 정치 자체의 영향력 확장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국가든 정치든 시민 안녕과 행복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출산율이 1.052였던 2017년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한국을 ‘집단자살 사회’라고 경고했다. 출산율 0.78이라는 통계를 본 외국 학자는 “한국은 망했다”고 했다. 2023년 2분기 출생율이 0.7로 최저다. 어떤 이들은 “국가의 자살”이라고 한다. 무한 성장과 인구 확장을 원한다면 저출산은 ‘망조’다. 애를 낳아 개고생하고 싶지도 않고 후세를 이런 헬조선에 살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기후위기 상황에서 인구 감소는 적정국가로 전환할 계기다. 창의적 상상력을 위한 교감이 절실하다.

한통속 부정경쟁

시민의 생명, 안전부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비롯한 권리 목록이 있다. 사회적 권리를 확장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대표자를 뽑아 권한을 위임하고 국가에 위탁해서 간접적으로 보장하는 방법이다. 시민 스스로 힘(자력)이 아니라 대표자나 국가라는 타인의 힘(타력)에 의한 보장이다. 둘째는 권리를 시민 자신이 직접 확보하는 것이다. 시민이 스스로 뭉치고 주장해서 확보하는 자력에 의한 방식이다.

진보든 보수든 정치인들은 ‘권리는 국가에 의해서 보장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표를 받아 당선되려 “제가 여러분 권리를 보장하겠습니다”라고 호소한다. 수많은 공약이 다 그런 메시지다. 이렇게 남이 대신하면 시민은 충분한 기여감과 자기 효능감을 느끼기 어렵다. 정치인은 리바이어던을 차지하려는 경쟁 속에서 권력 그 자체를 향한 욕망에 빠지기 십상이다.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작동하는 ‘권력의 운명’이다.

보수와 진보가 다른 것이 있긴 하다. 운동권이었다가 국민의힘 같은 보수 계열로 전향한 사람들은 자기 정당성을 위해 과거를 부정한다. 운동권 ‘아닌 척’한다. 너무 세게 부인하다 보니 과거에 경멸했던 이승만과 박정희를 추앙한다. 더불어민주당 계열로 들어간 사람들은 자기 정당성을 위해 과거를 자랑한다. 여전히 차별받는 시민과 ‘친한 척’ 한다. 과거 경력을 내세워 민주투사였다는 정통성을 자랑하다 지나치면 항일투쟁으로 거슬러 올라 족보를 만든다. 국민의힘 계열이든 민주당 계열이든 채우지 못한 지금 여기에서 내적 결핍이 역사투쟁을 부추긴다.

돼지 똥물이나 소 똥물도 강이나 바다에 못 버리게 하는데 방사능 오염수는 당연히 안 버려야 한다. 애초에 핵발전도 줄이고. 그런데 여기에 과학으로 치장한 주장을 들이대고 친일·반일 역사까지 얹어 아우성이다. 패거리의 ‘부정경쟁’으로 엉뚱하고 과도하며 소모적인 싸움으로 삶의 비전이 안 보이는데 애 낳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생길까.

긍정연대를 위한 교감

국가의 공백이 있다. 이민과 난민에게 그렇다. 이주민은 국가가 그어놓은 국경을 넘은 사람들이다. 국가에서만 권리가 보장되면 국적을 바꾼 사람들 권리를 내팽개칠 수 있다. 유럽에서 늘어난 이주민 혐오 정치가 그렇다. 국경 사이를 떠도는 난민도 그렇다. 기후위기는 국가가 채울 수 없는 치명적 공백이다. 하나의 국가가 아무리 탄소를 줄여도 지구적 차원의 기후위기를 해결 못 한다. 국제 협력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세계는 움츠러든다. 신냉전으로 국가들이 패거리로 나뉘고 전쟁까지 일으키며 지구적 협력이 ‘꽝’나고 있다.

시민이 권한을 위임하고 말면 국가는 군림하는 괴물이 된다. 자력에 의한 시민 권리 확장이 중요하다. 정치의 수준은 시민의 수준이다. 정치가 개판이라고 냉소에 그치는 것은 책임을 다 못하는 것이다. 노조의 수준은 조합원 수준이다. 노조가 썩었다며 뒤돌아서는 것은 책임을 다 못하는 것이다. 저마다의 세계관으로 스토리를 만들고 유튜브와 OTT를 흐르며 빌보드 차트와 아카데미상에 올라 세계를 누비는 K컬처에 비춰봐도 정치문화는 너무 초라하다. 괴물이 돼가는 국가와 상대를 물어뜯어 적대와 혐오의 좀비를 만드는 ‘부정경쟁’에 희망이 없다. 유일한 출구는 시민사회를 새로 구축하는 것이다. 그래야 정치도 다시 열릴 것이다.

이권, 인권, 권한, 권력을 구분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나마 기성세대보다 젊은 세대가 노조를 이익집단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반갑다.(한국노동연구원의 <청년세대의 노동운동과 일터 민주주의 보고서>에서 실리주의 노조를 선호하는 경향은 청년세대보다 기성세대가 강한 것으로 조사됐다.) 컨베이어 벨트나 담 없는 플랫폼에 접속해 일하는 ‘사회공장’은 전통적 노사갈등과 달리 클라이언트(고객)와 갈등이 문제고 직장내 괴롭힘은 ‘사이버 불링’처럼 다르게 나타난다. 이런 곳에서 일하는 시민의 가능성을 읽는다. 이익에 중독되지 않고 모두의 권리를 생각하는 노동시민을 만나면 설렌다. 동료 시민과 더 많이 교감하며 시민사회를 새로 구축하자. 곁의 일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개념이 다른 노조를 상상하자. 희망은 서로를 위한 교감과 상상력에 있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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