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홍 공인노무사(노무법인 돌꽃)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 군부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 같은 우리 역사를 돌이켜보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워온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을 우리는 ‘투사’라고 부른다. 이들 대부분은 투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기보다, 어떤 사건이나 경험을 통해 그렇게 ‘되어버린’ 경우가 많다. 우리는 주로 싸움의 ‘결과’에 주목하기 때문에, 시작한 ‘이유’는 잘 모른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지금부터는 역사 속의 거창한 인물은 아니지만, 평범했던 어느 직장의 한 노동자가 투사가 돼 약 2년간 싸워온 사건을 소개하려 한다. 투사라는 단어가 투박하게 들릴 수는 있고, 이 글을 읽는 당사자도 분명 손사래 치겠지만, 가까이서 그 과정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어울리는 표현을 찾지는 못하겠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노동자를 투사로 만들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하루일과 중 집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일터다. 가족이나 친구만큼 중요한 관계가 직장 동료다. 하지만 나의 일터와 동료들에게서 쫓겨나고 외면당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날 버린 직장을 미련 없이 떠나 새로운 직장을 찾아 나설 수도 있고,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법적 대응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의 권리를 되찾는 것을 넘어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작게는 회사를, 크게는 사회를 바꾸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기도 한다. 마지막의 경우가 앞서 얘기한 ‘투사’가 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건으로 돌아가자.

방송국에서 일했던 이 노동자는 형식적으로는 프리랜서 계약을 체결했지만, 7년 넘게 정규직과 동일한 업무를 하면서 회사가 시키는 여러 궂은일을 다 해왔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일방적인 계약종료 통보를 받았다. 방송업계에서는 잦은 일이기도 하고, 쉽지 않은 싸움일 뿐만 아니라 다시는 이 일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주변의 우려에도, 고심 끝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했다. 힘든 법적 공방 끝에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는 모두 해고가 부당하다는 판정과 함께 원직복직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회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심지어 정규직 노동자가 아닌 프리랜서로 복직시켰다. 상식에서 벗어난 법적 해석에, 고정 좌석을 없애고 컴퓨터도 없애는 등 투명인간 취급을 하며 괴롭힘까지 가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얼마나 잘못하면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던 노동자를 이렇게까지 사지로 몰아넣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계약상으로는 비정규직으로 채용됐지만, 실제로 정규직보다 더 정규직처럼 일해왔으니, 이제는 정규직으로 채용하라는 것이 그렇게도 무리한 요구인가? 상식적으로나 양심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요구다.

회사 앞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100일이 넘는 1인시위, 크고 작은 집회들을 하면서 회사를 협상장에 끌고 나오기를 수차례, 지금은 노동청으로부터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임이 확인됐으니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라는 시정지시까지 내려진 상황이다. 그동안 답답하고 무책임한 고용노동부의 모습에서 진일보한 큰 성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회사는 아직 행정소송을 취하하지 않았다.

어느 싸움도 쉬운 것은 없겠지만, ‘과연 내가 넘어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졌을 만큼 높은 벽 앞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결심을 끌어내, 결국 작은 희망을 만들어냈다. 아직 싸움이 끝난 건 아니지만, 아니 사실 끝이라는 게 존재하는 싸움인지도 모르겠지만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방송비정규직 싸움의 역사에서 ‘최태경’이라는 이름은 기억될 것이다.

얼마 전, ‘엔딩크레딧’이라는 시민단체가 출범했다. 방송비정규직 싸움을 했던 당사자들과 연대한 이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다. 지긋지긋한 방송업계의 비정규직 문제를 끝내겠다는 ‘엔딩’의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그렇다. 노동탄압의 끝을 보여주는 반노동 정권이지만, 위기 속에 더 단단해지는 것이 노동자들의 단결 아닌가.

집회의 현장에 가면 언제부터인가 구호 마지막에 고유명사처럼 외치는 말이 있다. “비정규직 철폐 투쟁! 결사 투쟁!” 단순히 고용형태의 차이를 둔 것이 아니라, 심각한 불평등과 차별을 낳는 하나의 신분이 돼버린, 우리 사회의 가장 어두운 그늘이자 절망의 상징인 비정규직은 없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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