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사내하청 노동자와 20년. 그동안 나는 변호사로서 상담하고 소송대리인으로 소송했다. 처음은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이었다. 2003년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 사내하청 노동조합이 설립돼 활동을 시작했을 때부터다. 그 이듬해에는 울산공장에서도 비정규직노조가 조직돼 현대자동차에서 원청 현대차를 상대로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이 나라에서 사내하청 노동자의 투쟁에는 정말 별일이 다 있었다. 노조위원장에 대한 식칼 테러까지 자행했을 정도로 현대자동차를 비롯해 사내하청 노조 활동에 대한 사용자의 탄압은 극심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하면, 원청은 자신이 사용자가 아니라며 교섭을 거부하면서 공장의 소유 및 관리 권한을 내세워 출입을 봉쇄했다. 비정규직 철폐, 정규직 전환, 임금인상 무엇이든 사내하청업체는 자신이 실질적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법은 원청을 사용자라고 선언해 주지 않았다. 원·하청 사용자가 불법파업이라고 고소·고발해도 사내하청 노동자와 노조를 대리해서 나는 원청이 실제 사용자라며 불법파업이 아니라고 수도 없이 변론했지만 당시 법원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원청은 하청업체와 도급계약을 해지하거나 갱신하지 않는 방법으로 사실상 사내하청 노동자에 대한 해고 권한을 행사했다. 그리고 20년, 이제는 이런 일은 없다고 나는 믿었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해서 많은 사업장에서 사내하청 노동은 파견근로라고 법원에서 판결도 받았고, 사용자들의 노골적인 탄압 소식도 듣지 못해서였다.

2. 하지만 아니었다. 지난주 한 자동차부품회사의 사내하청 노조 간부들과 상담이 있었다. 사내하청 노동자 약 150명이 원청 사업주를 상대로 파견근로를 주장하면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제기해서 다퉜다. 그런데 소송 중에 많은 원고들이 소를 취하했다. 그래서 상담하면서 노조 간부들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최근 유행하는 자회사를 설립해서 그 소속으로 전환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측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소를 취하했다고 했다. 그랬다. 여전히 이 나라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권리 주장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이제 항소심 재판을 해야 하는데, 70여명만 남았다. 상담하면서 원청이 하청업체와 도급계약을 갱신하지 않아 해고됐다며 사내하청 노조 간부들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제야 나는 생각했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해 이 나라에서 원청이 비정규직 투쟁을 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해고하지 않았던 것이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지난한 투쟁으로 쟁취한 것이라는 걸 떠올렸다. 분명히 그랬다. 이 나라에서 사내하청을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는 투쟁하지 않고 얻어진 것은 별로 없다. 아무리 파견근로라고, 원청 근로자로 인정된다고 법원이 판결하고,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조 활동이 보장된다 해도 여전히 이 나라에서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투쟁 없이 권리 없다.

3. 사실 아직도 사내하청 노동자의 권리 주장은 어렵다. 여전히 원청 등 사용자들은 권리를 삭감하려 하고, 노동자는 거기에 맞서기 쉽지 않다. 이 나라에서 대표적인 사내하청 노동자투쟁 사례로 들자면, 현대차·기아를 들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도 사내하청 노동자의 권리 주장은 만만치 않았다. 비록 파견근로라고 인정돼 법원에서 현대차·기아 등 원청 근로자지위를 판결로 확인받았지만, 사내하청 노동자 대부분은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기 전에 소를 취하하고 자신의 권리를 삭감하는 원청의 채용절차에 응했다. 원청 근로자 지위라는 오랜 바람이 이뤄지는 것이라서 끝까지 모든 권리를 찾겠다는 의지를 굽힌 것이리라. 이건 사내하청, 비정규직의 경우만 해당하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 노동자들의 권리 주장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통상임금 등 체불사건에서도 있다. 법적으로 100만원을 받을 수 있는데도 노사합의로 50만원만 받고서 소를 취하하고, 부제소합의를 한다. 분명히 끝까지 권리 주장을 하면 지연이자, 지연손해금 포함해서 모두 받아낼 수 있는데도, 사용자와 합의해서 중간에 그 권리를 삭감하는 걸 받아들인다. 대규모로 조합원들이 원고로 참여하는 소송의 대리인으로 사건을 하다 보니 이런 일을 많이 겪는다. 이런 일이 있을 때면, 노사합의를 한 노조 집행부도, 그 노사합의를 비판하는 세력도 자신이 원하는 답변을 내가 해주길 바란다. 그러다 내가 바라는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서운하다고 거리를 둔다.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면, 노동변호사로서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살아가는데 자부심 가득한 나도 낙심할 때가 있다. 어떠한 답변 요구도 받지 않는 이 자리에서 솔직히 말하면, 나는 노동자의 권리를 삭감하는 노사합의에 반대한다. 기아차 등 여러 사업장에서 통상임금에 관한 노사합의가 있었다. 1·2심 법원에서 상여금이 통상임금으로 포함된다며 조합원들의 청구가 인정된 상태에서 노동조합이 사용자와 교섭해서 노사합의를 했다. 내용을 보면 법적으로 인정받은 금액 모두를 사용자가 지급한다는 것이 아니다. 50~60% 정도를 지급받고서 조합원들이 소를 취하하고 부제소합의서를 제출하는 것이다. 법적으로 노동자의 임금 권리는 100% 지급받는데도, 이렇게 노사합의를 통해서 권리를 삭감하는 것이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노사합의에서도 그렇다.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에 따른 노동자의 손해배상, 근로자지위 등 권리는 사내하청 노동자의 것이지, 노동조합이 사용자와 협상해서 삭감할 게 아니다. 아무리 원청 근로자로 채용할 것을 원청 사용자로부터 약속받는다 해도 그건 파견법상 파견근로자로서 사내하청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일 뿐이다. 그 약속을 내세워 파견근로자로서 손해배상 등 원청 사용자에 대한 권리 주장을 포기하는 합의를 한다면, 그것은 사내하청 노동자의 권리를 빼앗는 짓이 아닐 수 없다. 법적으로 파견근로로 인정되는 경우라면.

4.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노동자 권리를 쟁취를 위해서 존재한다. 노동조합은 조합원이 가진 노동자 권리를 사용자와 협상해서 삭감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임금인상, 근로시간 단축, 정규직 등 근로자 지위 확보, 고용 보장 등 기존에 조합원의 권리로 보장되지 않은 것을 권리로 쟁취하기 위해서 사용자를 상대로 교섭하고 쟁의하는 것, 이것이 노동조합의 일이고 존재 이유다. 결코 이미 확보된 노동자 권리를 두고서 사용자와 협상해서 빼앗는 걸 노동조합의 일이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노동자의 근로조건 향상을 위해 단결권 등 노동기본권을 보장하고(33조1항),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은 노동조합을 근로조건의 유지, 개선 기타 근로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하도록 정의하고 있는 것은(2조4호) 이처럼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활동해야 한다는 노동조합의 존재 이유를 밝힌 것이다. 법적으로 보자면, 이미 확보된 권리를 빼앗는 것은 노동조합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노동조합은 그렇지 못하다. 이상하게도 체불임금 등 이미 조합원이 일해서 확보한 임금권리를 두고서 사용자와 협상해서 삭감하는 걸 당당하게 해왔다. 너무도 당당해서 그 일이 당연히 노동조합의 일인 것으로 알 지경이다. 심지어는 조합원도 자신의 권리를 사용자가 이행하지 않고 침해하는 일이 생기면 노동조합을 통해 협상하고 일부 양보하고서 받는 걸 당연하게 여길 지경이다. 이 나라에서 수많은 노사합의서를 읽어보라. 거기에는 조합원의 권리를 두고서 노동조합이 사용자와 협상하고, 양보해서 사용자가 조합원에게 그 일부만 이행하고 지급하기로 노사합의 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 것이다. 이런 노사합의서가 멀고 먼 조합원의 권리 구제를 신속히 하기 위한 것이라도 권리 일부를 양보했기에 나는 그것이 노동조합의 일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이 나라에서 수많은 노사합의, 단체협약을 상담했다. 그걸 통해서 파악한 것이 있다. 이 나라에서 노동조합은 조합원을 위해 새로운 노동자 권리를 쟁취하는데 게으르다. 임금인상을 제외한다면 근로시간은 근로기준법이 규정한 법정근로시간을 그대로 소정근로시간으로 하고, 인사이동과 해고, 구조조정도 근로기준법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한 채 법이 개정되면 그에 따라 변경하기 바빴다. 무슨 새로운 노동자 권리를 조합원에게 쟁취해 줬다고 내세울 게 없다. 아무리 민주노조, 강성노조라고 해도 쟁취해 낸 노동자 권리로 보자면 별 것 없다. 이 나라에서 노동조합이 쟁취한 노동자 권리가 보잘 것 없는 것은, 이미 확보한 노동자 권리를 두고 사용자와 협상하는 걸 자신의 일로 몰두했던 탓은 아니었을까.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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