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거대 정당이 철 지난 ‘이념 놀이’에 흠뻑 빠진 사이에 청년 실업은 바닥을 치고, ‘묻지마’ 범죄는 기승을 부리고, 지친 교사들은 잇따라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다. 그 틈에 낀 언론은 정파로 나뉘어 ‘자기 편 이겨라’는 응원단장 같은 기사만 쏟아낸다.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배출로 어느 때보다 한·일 국민 신경이 날카로운 이때 우리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 별장에서 한·미·일 정상회의를 열었지만 화려한 미사여구 외에 구체적인 대안은 없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지난달 28일 1면과 3면에 걸쳐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을 인터뷰해 일본에 면죄부 주기에 급급했다. 이날 조선일보는 1면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IAEA가 안전 관여(했다)”는 일본 외무상 발언을 제목 달았다. 조선일보는 이날 3면에도 “윤 대통령 결의로 양국 좋아져… 방류, 한국인들의 염려 이해한다”며 같은 이의 발언을 제목 달아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3면에 딸린 기사에도 “안보·경제 파트너라는 윤 대통령의 최근 연설(을) 일본은 공감하고 환영(한다)”며 역시 같은 이의 발언을 제목 달았다.

친민주당 지지자들이라면 한일관계가 엄중한 이 시국에 ‘일본 외무상 인터뷰’가 웬 말이냐며 난리 치겠지만, 언론이라면 충분히 인터뷰할 수 있다. 다만 ‘공격적 질문’으로 일본이 감추고 싶은 말을 캐야 한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까지 찾아가서 조선일보가 한 질문은 대부분 추상적이라 일본 외무상은 잘도 빠져나가면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놨다. 지면에 나온 첫 질문은 “오염수 방류에 대한 한국의 비판 여론이 거세다”였다. 일본이 너무도 쉽게 예상한 질문에 구체성도 떨어졌다. 이에 일본 외무상은 “한국민의 안심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 긴밀히 소통하고 있다”고 했다. ‘긴밀한 소통’이 무엇인지는 없다.

일본엔 이렇게 후했던 조선일보는 같은 날 2면에선 “또 죽창가 합창하고 노 재팬 꺼내고… 巨野의 아스팔트 정치”라는 제목을 달아 8월26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앞에서 열린 오염수 방류 반대 집회를 다뤘다. 이 기사 첫 문장은 “더불어민주당과 민주노총 등 야권 성향 단체는~”으로 시작한다. 민주노총을 친민주당으로 분류하는 게 맞냐 아니냐는 둘째 문제다. 이날 집회엔 민주노총뿐 아니라 여러 시민사회단체가 참가했는데도 조선일보는 깡그리 무시하고 민주당 집회라는 이분법으로 ‘퉁’쳤다. 오염수 방류를 보는 조선일보의 시선은 일본 아사히나 요미우리보다 못하다.

현 시국에 민주당이 잘하는 것도 없지만 ‘민주당은 악,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선’이고 나머지는 모두 흑싸리 껍데기일 뿐이라는 조선일보의 시선은 반세기 전 영화 스타워즈에서나 나올 법한 극단적 이분법이다.

서이초 교사 사망에 영향을 준 ‘연필사건’의 가해 학생 학부모가 현직 경찰 간부와 검찰 수사관이라는 특종 보도는 창간 한 달 남짓한 작은 인터넷 언론이 캐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물론이고 한국일보, 심지어 동아일보조차 8월 23일 12면에 “숨진 초등교사, ‘연필 사건’ 학부모 전화 받았다”는 제목으로 따라 썼지만,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지면엔 실리지 않았다.

한국의 여론 지형에서 큰 축을 담당하는 언론사가 이 지경이니 거대 두 정당은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극한 대치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그 틈에 갇힌 국민은 하루하루 숨쉬기조차 힘들다. 모든 걸 ‘정치’로 치환시키는 못된 버릇부터 바로잡아야 언론도 살고, 나라도 살고, 국민도 산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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