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기의 권력구조와 정치상황, 노동운동, 노동법의 전제하에 당시의 노동조직인 전평과 대한노총을 중요하게 고려해서 평가한다면 미군정기의 노동관계는 다음의 세 가지로 평가할 수 있다.

첫째, 미군정기의 노동관계는 미군정의 ‘전평 궤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미군정의 전평에 대한 태도를 노동조합의 ‘정치성’을 배제하고 ‘노동조합주의 그 자체의 실현’에 목적을 둔다는 일부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자유를 향한 민족해방투쟁과 긴밀하게 결합돼 노동운동이 전개돼 왔고 미래의 국가정치체제가 형성되는 긴박한 상황에서 일제 잔재 및 친일파 청산 등을 요구하는 정치투쟁이 노조 활동과 긴밀하게 결합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노동운동의 정치투쟁적 성격은 필요하고도 당연한 것이었다.

따라서 일체의 정치성을 배제한 ‘노동조합주의’는 문제가 있고, 설령 노동조합 정체성에서 정치성을 배제하려는 목적이라고 본다 해도 ‘정치성’ 그 자체가 문제라면 노동조합 조직에서 배제할 대상은 오히려 대한노총이어야 했다. 따라서 전평에 대한 미군정의 태도는 조합주의 그 자체의 실현이 아닌 남한에서 미국의 완전한 주도권 장악을 목적으로 하는 ‘전평 궤멸화’라고 봐야 한다.

둘째, 미군정기 노동관계는 미군정에 의한 ‘대한노총의 적극적 육성’으로 평가할 수 있다. 미군정은 남한에서 미국의 완전한 주도권 장악을 위해 조선의 기층 대중 지지를 받는 일체의 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8·15 이후 일제 잔재 및 친일파 척결로 전 민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하려 했던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정했던 것과 기층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받고 아래로부터 조직된 전평을 부정했던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결국 미국의 남한에서 완전한 주도권을 위해 미군정은 친일파와 이승만 세력과 결탁했고 우익 반공세력의 정치단체인 대한노총을 육성했던 것이다.

셋째, 미군정기의 노동관계는 일제시대 자유를 향한 민족해방투쟁과 결합해 전개·축적된 노동운동으로부터 단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일제통치시대에는 식민지정책을 강행해 근대사회의 노사관계가 형성되기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일제시대의 노동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판단하는 것은 오류다. 일제시대의 노동운동은 근대사회의 노동관계와 연결시키는 방향에서 노동운동과 노동법의 역사 안으로 포섭된다.

1920년대의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연맹회, 조선노동총동맹과 같은 노동조직이 존재했던 점, 1920년대 후반에 4개월 이상이라는 장구한 투쟁을 계속한 원산총파업과 같은 노동쟁의가 존재했던 점 나아가 1930년대 일제의 폭압적인 탄압에 의해 비록 비합법화됐지만 지하에서 활동을 전개했던 흥남의 태평양노조운동, 서울에서의 이재유 그룹의 운동, 원산의 혁명적 노조운동 등이 존재했다. 이러한 일제시대의 고난에 찬 노동운동은 8·15 이후의 전평의 탄생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일제 시기부터 축적된 노동운동은 미군정의 전평 궤멸화 속에서 심각하게 단절된다.

노조와 정치성의 관계는?

끝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노동조합의 정체성에서 일체의 정치성을 부정하려는 오류가 아직도 팽배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조직도 정치성과 무관한 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조합은 여러 가지 압제적 권력에 의해 가장 기층에서 억압받기 때문에 특정 시기에는 다른 조직보다 더 정치적일 수 있다.

노조의 본질상 주요한 문제는 오히려 ‘정치성’보다는 그 정치성이 기층 노동자 대중의 자발적 의사에 의한 ‘자주적’ 정치성이냐는 것이다. 즉 노조의 정체성은 자주성 그리고 민주성과 관련된 것이지 목표실현을 위한 경제체제 선택으로서 기존 체제하의 근로조건 개선인가 아니면 체제개혁을 통한 근로조건 개선인가 하는 문제와는 무관하다. 결국 전평과 달리 대한노총은 ‘자주성을 상실한 정치적 단체’였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미군정기 허구적 노동관계법령

덧붙여서 미군정 시기 노동법에서 거론된 몇 가지의 노동관계법령에 대해 평가하고자 한다. 미군정기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민주적 노사관계 내지 노동운동의 정립을 위한 명확하고도 철저한 법제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라는 평가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노동법의 목적이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자본주의 체제 유지와 건전화를 위한 ‘안전핀’ 기능이라고 할 때, 미군정은 당시 남한 노동대중의 적극적 요구를 해결하고 체제화할 시스템으로서 최소한의 근로조건 기준 확보와 단결권의 실질적 용인 나아가 일정 부분 단체행동권의 보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미군정 시기 마련된 법령 19호는 사실상 실질적인 단결금지 정책이었다. 법령 19호2조는 중요하게 군정청에 설치된 조정위원회를 통한 노동관계 문제의 해결을 강제했다. 이는 단순한 ‘노조활동 방임’ 차원이 아닌 국가권력에 의한 노조활동 일반에 대한 개입 강제로서 성격을 갖는다. 사실상의 단결금지 정책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법령 19호2조에 대한 당시 사법부의 해석(법령 자체의 형식적 규정이나 노동행정기구 내부방침보다 본질적 의미를 갖는다)에 비춰보면 “비상조치로 인해 노동조합주의의 인정된 방법을 이용할 특권이 빼앗겨 그 권리를 잃는 것”으로 해석되는 만큼, 사실상 노조의 일반적인 활동을 금지한 단결금지 정책이라고 평가해야 한다.

법령 97호는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기타 제반 단결활동을 합법화시킨 것으로서 형식적으로는 법령 19호보다 발전된 노동정책이었다. 법령 97호의 가장 중요한 조항은 1조 ‘정책선포’이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항은 민주적 노동단체의 육성을 지원한다. 2항은 모든 노동자는 사용자나 그 대리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적인 단체를 결성하고 이에 가입하거나 노동조합연합회를 조직 또는 가입해 다른 노동조합을 지원하거나 지원받을 권리가 있으며 고용조건을 고용계약 기관과 협의할 목적으로 스스로 선출한 대표자를 지명할 권리가 있다. 3항은 사용자와 노조가 체결한 임금, 노동시간, 그 밖의 고용조건이나 노사 간의 평화적 교섭은 이를 권장한다는 내용이다.

법령 97호는 이전의 법령 19호2조와 다르게 ‘민주적 노동단체의 육성을 지원한다’라고 밝혔다. 노조의 인정을 실제화하고 ‘고용조건이나 노사 간 평화적 교섭은 권장한다’고 해 노조 활동 등 기타 단체교섭권을 보장함으로써 진전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전평은 궤멸시키고 대한노총에게만 적용하는 ‘허구적인 법’으로 평가할 수 있다. 미군정의 전평 궤멸 정책이 당시의 노동대중을 폭력화하는 원인은 아니었을까.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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