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가현 노동활동가

전세 계약을 했다. 과거 경험에 비춰 피할 조건 몇 가지만 정했다. 부모님 집에 짐을 맡기고 살지 않고 독립하려면 원룸은 좁다. 반지하에서 기관지와 피부 문제로 고생했었다. 1층은 치안 문제를 여러 번 겪었다. 나보다 5살 많은 집에 살았을 때는 누수와 냉난방 문제가 있었다. 매월 내야 할 금액은 예기치 못한 실업의 상태에서도 감당할 수 있는 정도여야 한다.

처음엔 월세를 구하려고 했다. 전세와 전세자금대출은 무자본 갭투자의 동력이다. 임대인은 이자도 없이 전세보증금이라는 큰 금액을 사용할 수 있는 이익을 누린다. 임대인이 사용하는 금액의 이자는 임차인이 임대료 대신 대출 이자라는 명목으로 꼬박꼬박 은행에 낸다. 무자본 갭투자에 성공하면 임대인은 돈을 벌지만, 실패하면 실패 부담은 임대인 외에도 임차인과 은행도 함께 진다. 대신 임차인은 전세자금대출을 통해 월세에 비해 저렴한 비용으로 거주한다. 갭투자를 조장하는 전세와 전세자금대출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거부감이 있다고 현실에서 언제나 감정에 앞선 선택이나 내가 바라는 선택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원하는 조건을 만족하는 집을 서울에서 구하려면 내 월급의 3분의 1 정도를 써야 한다. 월 소득 대비 주택임대료 비율(RIR)이 30%를 넘어가면 대개 주거 취약층으로 본다고 한다. 반면 전세로 집을 구한다면 1~2%대의 이자로 청년전세자금대출을 받을 수 있다. 허그 대출의 경우 목적물에 따라 대출 가능 여부와 한도가 결정되는 것이기에 무직 상태여도 보증금의 80%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내 월급의 15% 정도로 주거비를 충당할 수 있다. 무자본 갭투자의 협력자가 되는 것이 여러모로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이는 조건이다. 보증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매물들만 알아봤으니 더욱 그렇다.

노동자 주택은 먼 이야기다. 대기업 정규직이나 공무원도 아니니 회사 대출이나 사택은 선택지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주택 등 현재의 공공임대주택은 선정되기도 어렵고 동거인이 있는 사람의 사정을 고려할 만큼 유연하지 못하며 오래 거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제 또 실업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월급의 3분의 1이 월세로 나가는 것은 겁이 난다.

지금의 사회에서는 노동소득으로 안정적인 거주를 기대하기 어렵다. 기댈 수 있는 건 ‘노동하는 나’가 아니라 정부지원과 은행 대출이다. 정부가 나에게 제시하는 듯한 길은 이렇다. 20대에는 좁고 치안이 좋지 않은 집에서 월세로 살면서 돈을 모은다. 청년전세자금대출로 전세보증금의 80%까지 대출이 나오니까 나머지 20%를 모았을 때 전세로 옮긴다. 만 34세까지 청년으로 지원받으며 바짝 돈을 모은다. 그 이후 30~50년의 대출을 받아 내 집 장만을 하여 남은 평생을 월세 내듯 대출금을 갚는다. 이게 그나마 내가 원하는 안정적인 거주를 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길로 보일 지경이다.

주거와 노동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소득과 고용상태의 불안정성은 ‘계속 이 월세를 내며 살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을 준다. 낮은 소득은 열악한 거주환경에 살도록 만든다. 불안정한 주거와 높은 거주비는 다시 불안정한 노동환경을 유지하는 동력이 된다. 집에서 숨만 쉴 때도 내야 하는 주거비를 위해 노동조건을 가릴 것도 없이 바로 취업하게 만든다. 그나마 실업급여가 있다면 버틴다.

30년을 살며 거쳐온 집만 15곳이다. 이사에 남은 연차를 털어 넣고 싶지 않다. 이사 갈 걱정 없이 내 손때와 역사가 묻은 집에 오래 살고 싶다. 임대인과 그 부모의 재정과 건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집에 살고 싶다. 원치 않는 실업이 걱정되는 상황에서도 노동소득으로 안정적인 거주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한국 사회에서 저임금 노동자가 갖기에는 너무 큰 꿈일까? 광주형 일자리를 처음 알게 됐을 때 제일 부러웠던 건 주거에 대한 고민을 함께하고 주거비를 지원한다는 점이었다. 노동과 주거는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노동활동가 (bethemi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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