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전경.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원청과 직접 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재하청’ 노동자가 사고를 당했더라도 원청이 가입한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원청 요구에 따라 보험계약상 담보사업에 속하는 작업을 하청업체가 의뢰한 재하청 업체가 진행했다면 원청 보험사의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는 취지다.

인력업체 소속 일용직 하반신 마비
재하청 노동자의 ‘공동피보험자 자격’ 다퉈져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노동자 A씨가 DB손해보험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등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5일 밝혔다.

사건은 A씨가 2014년 신축공사 현장에서 배전반을 옮기다 하반신이 마비되며 시작됐다. A씨는 전기통신공사업을 하는 B사와 배전반 설치 계약을 맺은 하청업체 C사가 인력용역업체(재하청)인 D사에 인력제공을 의뢰하면서 현장에 투입됐다.

사고를 당한 A씨는 원청인 B사가 가입한 보험사를 상대로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며 2015년 2월 소송을 냈다. B사의 하청업체 노동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반면 보험사측은 “배전반 설치 계약은 도급계약이 아닌 자재납품계약에 불과하고 A씨는 B사의 하청업체 노동자가 아니다”고 맞섰다.

쟁점은 ‘B사의 원·하청업체에 속한 근로자에게 생긴 손해에 관해서도 보상한다’고 정한 재해보상책임보험 약관의 해석 여부였다. A씨가 하청인 C사 소속 노동자인지가 다퉈졌다. 1심은 “C사와 A씨의 관계는 실질적으로 사용자·피용자 관계와 다를 바 없다”며 보험사가 A씨에게 1억여원을 지급하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2심은 A씨가 하청인 C사 소속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C사가 작업자들에게 일반적인 안전수칙에 관한 지시를 한 것 외에는 배전반 운반·설치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나 감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다. 또 A씨가 일용직으로 일하며 C사가 인력용역업체에 지급한 노무비를 받았다고 해석했다.

대법원 “재하청 수행한 작업은 담보사업 해당”
“보험약관상 공동피보험자 및 담보대상”

대법원은 2심을 다시 뒤집고 보험사가 A씨에게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원청인 B사가 재하청 관계를 미리 알고 있었던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하청업체는 배전반을 제조할 뿐 운반·설치에 관해 전문적 지식이나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이 근거가 됐다. C사는 도급계약 체결 전에 미리 B사에 전문업체를 구해 설치 작업을 마쳐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C사는 재하청인 D사에 배전반 운반·설치 작업을 의뢰했고, D사는 일용직 노동자를 현장에 투입했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은 “비록 D사는 B사와 직접 계약을 체결한 하청업체는 아니지만, 보험계약상 담보사업에 속하는 운반·설치 작업을 B사 요구에 따라 담당하기로 예정돼 있었다”며 “실제로 D사가 해당 작업을 수행했으므로 D사와 A씨는 보험계약에서 정한 공동피보험자 및 담보대상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원심은 D사가 B사와 직접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B사의 하청업체 사업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고 D사의 근로자인 A씨가 보험계약 담보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다만 이번 판결이 재하청 노동자의 손해배상 책임을 일반적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대법원 관계자는 “원고가 속한 업체가 원청과 직접 계약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배전반 운반·설치 작업을 담당하게 된 경위 등에 비춰 해당 업체도 공동피보험자에는 해당한다고 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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