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결혼을 앞둔 여성을 만나면 축하를 보내면서도 마음이 복잡하다. 내 평범한 결혼생활을 비관해서도 아니고, 비혼이 좋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은 세대에게 결혼이란 자신의 ‘젠더’를 자각하는 기회이지 싶다.

연애결혼이 보편적인 시대에 여성이 또 다른 가족을 만드는 일은 지극히 사적인 선택같이 여겨진다. 그런데 가부장제란 일일연속극처럼 인격적 모독을 일삼는 남편·시부모가 있어서만은 아니다. 마치 공기와 같은 일상이다. 우리 구체적 삶에서 남녀 간 사랑과 양보, 부모·자식 간 보살핌 같이 지극히 개인적 얼굴을 하고 마주할 뿐이다.

물론 가부장제는 여성=피해자, 남성=가해자 같은 서사가 아니다. 어느 한쪽이든 성역할을 과중하게 부여할수록 그 개인의 고유한 개성은 지워지고, 역할을 감당하는 남성도 버겁긴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결혼 후 아내이자 며느리, 엄마 등 새로운 역할을 다층적으로 부여받는 쪽은 여성이기 쉽다. 특히 아이가 생기면 ‘○○○ 엄마’가 아닌 자기 이름 석 자를 유지하려면 개인의 의지만 아니라 여러 행운이 뒤따라야 한다. 우선 일이 육아와 병행할 수 있는 근로시간과 노동강도여야 한다. 믿고 안정적으로 아이를 돌봐줄 부모님이나 어린이집 등도 필요하다. 운이 좋으면 가사노동과 육아에 적극적인 남편과 함께할 수 있다. 남편 인격이나 노력만의 문제도 아니다. 남성 직장이 야근이나 회식도 많지 않고, 노동강도가 지나치게 강하지 않아야 가능하다. 무엇보다 아이가 건강하고 기질이 과하게 예민하지 않은 것도 중요하다.

역시 운이 좋으면 합리적 시부모님을 만나 제사·명절·생신 등 이름 붙은 날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가부장적 문화란 단순히 인식의 문제를 넘어서는 물질적 기반이 엄연히 존재한다. 한국 부모들은 10대 중반부터 20대까지 상당한 교육비를 감내하도록 사회문화적으로 사실상 강요받을 뿐 아니라, 혼례 및 주거 기반까지 적지 않은 책임을 진다. 심지어 손주 육아까지 맡아 평생 자식에게 헌신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환경에서 부모의 기대나 요구가 합리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모든 상황에 행운만 함께하기 어렵다. 여성이 여러 이유로 좌절하는 데에는 개인의 의지나 가족의 노력만으로 넘어서기 어려운 사회구조적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서다. 단순히 육아휴직이나 어린이집 증설 등 제도 문제만도 아니다. 어쨌든 아내는 크고 작은 가사부터 돌봄까지 여성이 더 적합하고, 최종 책임자라 이해하는 배우자나 가족, 사회의 기대를 무시하기 쉽지 않다. 아니, 여성 스스로 성역할을 어느 정도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그럼에도 자신의 일이나 사회적 관계 등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싶다면 그 부담과 선택의 딜레마는 남성보다 커질 수밖에 없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육아와 가사 분담을 성실히 하는 남성은 좋은 남편이자 아빠가 되지만, 여성의 이중 노동은 당연하다. 업무가 과중해 집에서 잠만 자는 남편은 양해해도, 직장 일로 바쁜 아내나 엄마는 왜 ‘자기’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지 설명을 요구받는다. 학교든 사회든 자녀교육의 사소한 내용부터 최종책임을 묻는 사람도 어머니다. 아이나 부모님 건강이 불편하면 휴가라도 써 돌봄을 감수하는 경우도 여성이 많다. 명절에 중노동하는 불운까진 아녀도, 친지 선물을 챙기고 종종걸음으로 다과라도 내오며 어른들에게 상냥한 태도를 기대받는 쪽도 며느리다. 부부가 함께하려면 모든 불합리함에 문제를 제기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은 적절히 넘어가거나 수용하고 때로 싸워서 조정할 수 있을 뿐이다.

한국 사회는 점점 행운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회로 가고 있고,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여성이 늘어나는 현상은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불운도 감당하겠단 용감한 여성들 선택이 좀 더 행복한 결정이 되려면 현 질서에 균열을 내는 남성이 많아지는 것도 중요하다. 재활용쓰레기 정도가 아니라 매일의 지루한 가사노동에 적극적인 남편, 상사의 눈치에도 육아휴직을 신청하는 예비아빠, 아이와 씨름하며 등하원을 맡거나 저녁모임·주말약속은 가능한 피해 자녀·부모님 등 집안 대소사를 챙기는 아빠, 명절이나 이름 붙은 날에 부모님과 아내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며 뭐라도 해보느라 몸도 맘도 바쁜 아들, 이런 ‘요즘 남자들’이 훨씬 늘어나길 기대해본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haeyoonj@naf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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