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민 충남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1791년 오늘(8월 22~23일), 카리브해 섬 생도맹그(Sanit-Domingue) 북부지역, 사탕수수 농장의 흑인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생도맹그는 당시 프랑스의 가장 ‘부유한’ 식민지로, 유럽의 설탕과 커피, 면화 소비량 중 절반가량을 생산하고 있었다. 매년 수 만명의 흑인 노예들이 아프리카에서 ‘수입’됐다. 약 50만명이 넘는 이들이 억압과 착취의 사슬에 묶여 플랜테이션 등에 갈아 넣어졌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물결은 생도맹그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1791년 이들의 반란은 혁명의 불씨를 틔운다. 십수 년간 저항이 이어졌고, 1804년 1월1일, 아이티라는 이름의 공화국이 탄생한다. 신세계에서 처음, (흑인)노예들 스스로 독립국가를 쟁취한다. ‘아이티 혁명’이다.

프랑스 민중들의 투쟁이 생도맹그 노예들의 저항에 큰 영감을 주었듯, 아이티 혁명의 경험은 세계 곳곳에서 식민지배에 맞서 (노예)해방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줬다. 유네스코(UNESCO)는 1997년 제29차 총회에서 생도맹그 흑인 노예들의 반란이 세계 노예(무역) 제도 폐지에 미친 역사적 영향을 환기하면서, 8월23일을 ‘세계 노예무역 및 철폐 기억의 날 (International Day for the Remembrance of the Slave Trade and its Abolition)’로 지정했다.

1807년에서 1808년, 영국과 미국이 노예무역을 금지했고, 1834년에는 영국이, 1863년에는 미국이 노예제를 폐지했다. 1930년 국제노동기구(ILO)는 노예노동의 종식을 위해 강제노동 (금지)협약을 채택한다. 1948년 유엔의 세계인권선언은 “어느 누구도 노예가 되거나 타인에게 예속된 상태에 놓여서는 안 된다. 노예제도와 노예매매는 어떤 형태로든 일절 금지된다”고 명시했다. 노예제가 합법이었던 마지막 국가라는 아프리카 모리타니에서도 1981년 노예제 폐지를 선언하고, 2007년에는 노예 소유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노예의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ILO와 국제이주기구(IOM), 국제인권단체 ‘워크프리재단(Walk Free Foundation)’이 지난해 함께 발표한 ‘세계 현대판 노예제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현대판 노예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 5천만명에 이른다. 이중 약 2천800만명이 강제노동의 굴레에, 약 2천200만명이 강제결혼의 사슬에 매여 있다. 현대판 노예란 강제노동, 강제결혼, 강요된 성매매, 아동 인신매매 등을 경험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들 규모는 2016년과 비교했을 때 25%나 늘어났다.

16세기 이후 노예(무역) 제도를 통해 제국과 자본가들이 얻은 막대한 이윤이 초기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본원적 축적(혹은 시초 축적)과 깊이 관련돼 있다면, 오늘날 현대판 노예 역시 세계적 차원으로 조직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지탱하는 데 여전히 주요한 역할을 한다.

한국 사회는 어떨까. 한국 사회에서도 강제 노동, 현대판 노예의 사슬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어 있다. 지난 20일 민주노총이 주최하는 전국이주노동자대회에 참여한 이주노동자들은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고 외쳤다. 고용허가제 제정 20년, 정부가 발표한 개편안은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에 대한 권리를 더욱 제한하고 있다. 기존에는 동일 업종에 한해서만 사업장 변경이 가능하도록 해 이주노동자들이 원하는 일에 접근하고 직업을 선택할 권리를 제한했다면, 앞으로는 일정 권역 안에서만 사업장 변경이 가능하도록 해,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살아갈 권리까지를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1791년 생도맹그, 2023년 대한민국, 인류의 역사는 두 세기를 지나왔지만,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예속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recherche@cnnodong.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