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계급관이 무엇입니까?”

그는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그는 내가 쓴 책을 내보였다. 중간중간 표시한 것이나 묻는 모양새로 미루어 대충 읽은 것 같지는 않았다. 책을 읽었다면 이미 어느 정도 파악했을 것으로 보였지만, 전통적 계급이론과 내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물었다.

아무리 좋은 법이 있어도 그것을 운영하는 인간이 엉망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대한민국 헌법은 어떠한 계급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계급은 분명히 존재한다. 계급에 대해 말하려면 계급의 존재를 우선 인정해야 한다. 누구나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실제 그런 경우가 꽤 있다. 계급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현실 부정이다.

노동과 자본이라는 계급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존재하는 계급의 투쟁은 불가피하지 않은가. 이것이 전통적 계급투쟁론이다. 그런데 그런 전통적 이론과 내 생각은 뭐가 다른지 질문과 답변이 꽤 오래 이어졌다.

“서로를 절멸 대상으로 볼 것인지, 극복 상대로 볼 것인지 차이가 있습니다.” 답변의 핵심 요지다. 노동자, 자본가 사이엔 결코 평화란 없다고 노래하며 자본가 계급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이런 답변은 불타오르는 분노는 시들고 뚝뚝 떨어지는 피의 적개심은 말라비틀어져 ‘맛간자’의 얘기로 들리지 않을까.

동일시와 적대

노동자와 자본가, 빈자와 부자를 민족으로 묶으면 하나다. 사용자도 노동자도 기업의 이름으로 묶으면 한 가족이다. 그러니 계급 따지지 말고 우리는 하나라는 주장은 사방에 널려있다. 갈등을 감추고 계급을 부정하는 동일시다. 통 크게 뭉치자는 것 같지만 존재를 부정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 근원적 폭력이 될 수 있다.

어떤 극단에서 일했던 프리랜서는 그 안에서 인권을 짓밟는 사람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 집단은 “네가 그렇게 떠드는 것이 우리 집단 이미지를 망친다”면서 그의 목소리를 묻으려 했고 집단 내부 피해자 존재는 철저히 부정당했다. 그는 너무 아파 죽음까지 생각했다. 동일시는 이렇게 크고 작은 집단들에서 나타난다.

동일시의 반대편에 적대가 있다. 서로를 절멸시켜 없애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동일시가 억압된 사람에게 침묵과 굴종을 강요한다면, 적대는 서로 다른 계급이 서로의 존재를 선명하게 인지한다. 그러나 상대를 없애야 하기에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결과로 흐른다.

적대적 관계에 필요한 것은 비타협적 투쟁이다.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약자에게 돌아올 보복이다. 억압하는 자에 대한 적개심을 느끼는 것이 정의라고 여길 수 있지만, 적대감은 지배계급에게 자신이 절멸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일으킨다. 그들의 강렬하고 잔혹한 반격을 불러온다. 둘째로 공동체에 파멸적이다. 서로를 절멸 대상으로 보면 노동자는 자본가를 때려죽여야 한다. 반대로 자본가들은 노동자와 좌파를 때려죽여야 한다. 그런 참화들이 6·25전쟁, 킬링필드, 문화대혁명으로 나타났다. 이런 사례에 정치는 없고 야만적 폭력이 있을 뿐이다.

역사적 사례가 너무 거대한 사건이라면, 삼성을 생각하자. 노조가 생기면 회사가 망한다는 공포가 경영자들을 70년 넘게 지배했다. 노조가 생기면 절멸시켰다. 이제 삼성그룹에 노사교섭도 있고 파업도 있다. 여기까지 오는데 노동자 희생도 있었다. 아직 삼성그룹에 정상적 노사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조선, 자동차, 철강 산업에 비교한다면 반도체 산업은 노조의 생산통제력에 노출될 경우 훨씬 치명적인 산업 배경도 작용한다. 때문에 기업은 생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단결권과 교섭권은 인정하지만 파업권을 최대한 무력화한다.

차이를 다루는 역량

노조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신생노조 조합원들에게 물었다. 만약 나와 상관없다고 한다면 ‘노조는 꽝’이다, 노조를 기업이나 자신에게 부담만 된다고 생각하면 ‘노조는 짐’이다, 이익집단으로 본다면 ‘노조는 돈’이다. 권력으로 본다면 ‘노조는 힘’이다, 서로를 존중하는 권리로 본다면 ‘노조는 정’이라는 식으로 답하도록 했다. 노조를 이익집단으로 생각하는 풍토가 많아 노조를 돈으로 여기는 조합원이 상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3분의 2 이상이 ‘노조는 정’이라고 답했다.

차이가 공포와 만나면 동일시로 나타난다. 지배하는 계급은 반란의 공포 때문에 계급을 부정하고 지배당하는 계급은 보복의 공포 때문에 침묵한다. 차이가 적대감과 만나면 갈등은 폭발한다. 지배당하는 계급은 분노로 저항하고 지배하는 계급은 보복으로 제압한다. 차이가 서로를 존중해야 할 생명이자 공동체의 동료시민으로 생각하는 ‘정’과 만나면 에너지로 바뀐다.

‘화이부동(和而不同)’ 계급관을 묻는 그에게도 이렇게 얘기했다. 소인은 생각이 같은 사람과도 어울리지도 못하지만, 군자는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어울린다. 어울린다는 것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우렁더우렁 뒤섞이는 것이 아니다. 어울리지만 결코 동화되지 않는다. 노동자와 사용자는 다르다. 그러나 절멸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관계를 맺되 서로의 차이를 잊지 않는다. 대립하지만 절멸시키려 하지는 않는다. 어울리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역동적 관계로 만드는 것이다.

목표는 계급지배를 그대로 유지하는 ‘억압적 공존’이나 대립하는 계급의 ‘적대적 공멸’이 아니라 서로 변해가는 ‘역동적 공존’에 있다. 차이가 공포와 섞이면 근원적 폭력이 되고, 차이가 적대와 섞이면 폭발하지만, 차이가 ‘정’과 섞이면 낭만에 이른다.

낭만 같은 소리

낭만(浪漫)이란 흔히 말하는 로망(roman) 혹은 로맨스(romance)의 한자식 표현이다. 엄중한 계급투쟁 현장에서 어떻게 낭만을 찾을 수 있을까. 억압하고 억압당하는 관계에서 무슨 로맨틱한 분위기를 찾는단 말인가. 그래서 정치든 계급운동이든 사회운동에서 ‘낭만주의’라는 것은 정신 나간 소리거나 비과학적인 망상쯤으로 취급 당한다.

낭만이 있는 대통령이라면 얼마나 멋질까. 지난 5월, 취임 1년을 맞아 대통령 리더십을 연구하는 곳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낭만검객형’으로 꼽은 적이 있다. 검사 시절에도 그를 ‘낭만검객’으로 불렀던 언론도 있었다. 그런데 모든 차이를 법원으로 끌어들여 죄인이냐, 아니냐로 끌고 가는 사법화, 차이를 진영대결로 끌고 가더니 신냉전으로 확장하는 외교에서 낭만을 어떻게 느낄까. 우리에게 필요한 낭만은 차이를 다루는 탄탄한 역량에서 나오는 낭만이다.

낭만이 흐르는 투쟁이 성공적이다. 투쟁은 특정 상대와 부딪치기에 적대감이 있다. 그러나 어떤 투쟁이든 혼자는 어렵기 때문에 뭉치고 연대하는 정이 필요하다. 최대 규모 정리해고에 맞서던 현대차에도 몸뻬 바지 입은 조합원의 간드러진 노래에 수천 조합원이 열광하던 야간문화제가 있었고, 2009년 쌍용차에도 함께 노래하고 춤추던 밤문화제가 있었으며, 머리통 깨지고 뼈가 부러졌던 SJM 폭력 현장에도 강남스타일에 맞춰 춤추며 놀던 낭만이 있었다.

우주 멀리서 보면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 지구에서 기껏 백년을 살면서 무슨 욕망이 그리도 많을까. 모든 것의 질서를 해체하고 결국은 흩어버리고 마는 엔트로피 증가 법칙이 작동하는 우주에서 마침내 흩어질지라도 꽃을 피우는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이자 생명의 찬란한 승리가 사랑이라면, 자신의 생존과 서로의 공존을 이루는데 사랑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다정함을 잃으면 한반도는 세계 어느 곳보다 위험하다. 그렇다. 지금 낭만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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