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 트럭 시뮬레이터2 게임 플레이 화면 갈무리.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2 게임 플레이 화면 갈무리. 

주말 아침 젖은 머리를 채 다 말리지 않고 수건을 목에 걸친 채 운전석에 앉는다.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건다. 몇 장의 계약서를 훑어본다. 어떤 건은 거리당 요금이 높지만 운송거리가 짧아 총비용은 낮다. 거리당 요금이 적당하고, 어느 정도 운송거리도 보장한 계약 위주로 찾는다. 총비용이 3만유로를 넘기는 계약이 있지만 10시간을 운전해야 한다. 사고 위험과 피로도를 생각해 1만유로대 계약으로 고른다. 350킬로미터를 고철을 싣고 달리는 계약이다. 같은 거리에 훨씬 많은 돈을 주는 계약도 있지만 ‘위험 화물’이라 계약을 수주할 수 없었다. 아뿔싸 공회전이 많았다. 후진기어를 넣고 차를 뺀다. 가속 페달(액셀)을 서서히 밟는다. 엘리제를 위하여(띠리리리♬리리♬리리리♬).

▲ 게임 플레이 화면 갈무리. 
▲ 게임 플레이 화면 갈무리. 

도로에 진입했다. 화물 인수처는 도시 외곽에 있다. 슬슬 도시를 빠져나갔더니 폐품 공장이 보인다. 도로는 어느새 비포장이다. 20분여를 달려 핸들이 튄다. 이래서 비포장도로가 싫다. 차선도 없어져 공장에서 빠져나온 차량들과 마주한다. 에라이. 그냥 딴 계약 할걸. 이맛살을 찌푸리며 공장에 도착해 화물을 인수한다. 공장 안이 좁아 차를 돌려 트레일러를 가져다 대기 어려웠다. 몇 차례나 전진과 후진을 반복한다. 다행히 사람이 없다.

덜컹. 트레일러를 연결했다. 이제 내달리는 일만 남았다. 운송시간은 여유가 있지만 그래도 빨리 일을 마치는 게 좋다. 목적지를 입력한 내비게이션이 안내를 시작한다. “왼쪽입니다.” 비포장도로를 벗어나 도로로 진입하니 쾌적하다. 왕복 2차로 고속도로에는 몇 대의 세단과 트럭이 달린다. 추월할까? 마침 곡선구간에 진입해 관두기로 한다. 기름이 별로 없는 걸 보니 중간에 주유를 해야겠다. 고즈넉한 마음에 라디오를 켠다. 운전은 단조롭다. 차선 유지를 위해 핸들을 슬쩍슬쩍 옮긴다. 앞에 차가 서행하면 브레이크를 밟는다. 합류차선에서 차가 끼어들려 해 경적을 울렸다. 어딜. 그런데 슬슬 배가 고프다. 하긴 벌써 운전만 두 시간을 했다. 이 계약을 마치고 밥을 먹을까 했는데 뭐라도 먹어야겠다. ‘멈춤’ 버튼을 누르고 운전석을, 아니 컴퓨터를 벗어난다. 아침 차리기 귀찮네.

게임을 하다 어깨가 아팠다

게임 플레이 화면 갈무리. <이재 기자>
게임 플레이 화면 갈무리. <이재 기자>

약간의 과장을 더했지만 주말 아침 우리집의 풍경이다. 2012년 출시한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2>는 유럽을 배경으로 정교하게 화물 운송 시장을 묘사했다. 태어난 지 10년이 넘은 게임인데 유튜브 크리에이터들도 여전히 이 게임을 즐긴다. 인기가 더하면서 <아메리칸 트럭 시뮬레이터> 시리즈도 출시했다. 스마트폰으로도 다양한 아류작들이 있다. 프로그래밍 좀 할 줄 아는 게이머들은 이 게임에 자신의 국가지도를 삽입하기도 했다. 게이머의 다채로운 참여가 게임의 흥행을 지속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는 개발사는 이런 이른바 ‘모드’의 제작과 설치를 장려한다. 그래서 한국 맵(지도)도 있다. “개조의 끝은 순정”이라고 믿는 본인은 별도의 맵을 추가하진 않았지만 카X오T 내비게이션 모드를 추가해서 즐긴다.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이 게임을 하면 실제로 어깨가 아프다. 아침에 플레이를 하더라도 도로 위에 단조로운 풍경을 보고 라디오의 음성을 듣고 있노라면 잠이 솔솔 쏟아진다. 실제 졸음운전을 하다 중앙선을 넘긴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운송시간에 쫓겨 과속하다 트럭이 뒤집히는 바람에 화물에 손상이 가 차량 수리비와 화물 손해배상으로 돈만 날린 계약도 많다. 그리고 트럭 앞으로 안전거리 없이 끼어드는 소형차들은 뭔지! 비가 내리면 노면이 젖어 브레이크 제동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밤이 되면 사방이 깜깜해 좁은 도로를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달려야 한다. 맞은편 트럭이 상향등을 켜고 오면 어찌나 화가 나는지. 그렇게 격렬한 운송계약 한 건을 마치면 운전대를 놓고 믹스커피 한 잔을 타 마시며 휴식을 취해야 한다. 한 번은 집에 놀러 오신 친부께 운전대를 맡겨 봤는데 30년 넘는 운전 베테랑임에도 시동을 꺼뜨렸다. 아직 운전면허가 없던 친구에게 운전대를 맡겼더니 어깨가 굳어 마사지를 해줘야 했다.

현실을 감춰야 재밌는 현실적인 시뮬레이터 게임

이런 게임이 주는 재미는 다소 독특하다. 게임하면 떠오르는 폭력성과 즉각적인 쾌감은 없다. 대신 왠지 모를 평온함이 있다. 영화로 따지면 블록버스터 재미 대신 드라마가 주는 잔잔한 즐거움의 차이와 같다고나 할까. 이런 장르의 게임을 시뮬레이터 혹은 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 한다. 특정 분야를 최대한 현실감 있게 묘사하는 장르다. 과거 <팰콘>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항공기 시뮬레이터인 이 게임은 당시 최신예 기종들을 직접 몰아볼 수 있는 게임이다. 비행기의 조종간부터 각종 버튼까지 완벽에 가깝게 재현했다. 믿거나 말거나 미국 사관학교 교재로도 쓰였다고 한다. 시중에는 유로 트럭과 팰콘 외에도 버스 시뮬레이터(정말 버스를 운전해 승객을 운송한다), 잔디 깎기 시뮬레이터, 트랙터 시뮬레이터 같은 다종의 시뮬레이터 게임이 있다. 게임은 현실을 잊고 가상의 세계에 몸을 던져 휴식과 위안을 얻는 취미라는 일반화한 상식을 아예 뒤집는 셈이다. 이런 게임을 왜 할까.

25년 넘게 게임을 해온 게이머로서 말한다면 이런 게임은 ‘생략’이 미덕이다. 시뮬레이터 장르는 현실을 최대한 재현하는 장르인데 생략이라니? 모순이 아니다. 유로 트럭을 운전하는 나는 허기를 느끼지만 유로 트럭 속 나는 허기를 느끼지 않는다. 유로 트럭을 운전하는 나는 볼일을 보지만 유로 트럭 속 나는 볼일을 보지 않는다. 유로 트럭은 그렇게 실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많은 것들을 생략한다. 그럼으로써 온전히 트럭 운전과 화물 운송이라는 목적에 부합한다. 스피드레이싱 게임의 쾌감이 아니라 드라이브를 하는 정도의 긴장감으로 핸들과 기어 조작에 몰두한다. 그래서 이 게임은 게임 속 트럭의 창문을 내리면 실제로 바깥 소음이 커질 정도의 현실성은 갖추면서도 내가 트럭에서 내려야 하는 일의 현실성은 과감히 생략했다(이런 맥락에서 졸음을 ‘시뮬레이션’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단순히 생태적 인간성만 생략한 것도 아니다. 이 게임의 나는 일자리를 찾아 굽실거릴 일도 없다. 나만의 트럭이 없을 때 운송 에이전시에 고용된 특수고용직으로 수수료를 납부하지만 우리나라식 ‘중간착취’ 수준은 아니다. 정직하게 운전에 몰두하다 보면 어느새 수억원을 호가하는 나만의 트럭과 트레일러를 갖출 수 있다. 하는 일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여러 명의 운송기사를 고용할 수 있지만 나는 여전히 운전대를 잡고 유럽의 어딘지 모를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차창 밖 바람을 느낀다(고 상상한다). 그 평화로움이란! 현실에선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시뮬레이터 장르는 그렇게 현실을 재현하지만 모사하진 않는다.

단순한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과 현실의 빛바램

시중에는 다양한 형태의 이른바 ‘힐링’ 게임이 출시된다. 주로 단순한 작업을, 특히는 육체노동을 하는 게임들이다. 1인 개발로 유명한 <스타듀밸리>는 미국 시골 농장의 전원생활을 그린다. 그 안에도 농작물을 재배해 판매한다는 작은 경제시스템이 있지만 정밀하진 않다. 일단 주식시장이 없다. 일본에서 개발한 <천수의 사쿠나히메>는 야마토시대를 배경으로 가상의 섬에서 농작물을 일구는 게임이다. 게임의 주인공은 신이지만 논을 개간하고, 거름을 주고, 모내기하고, 수확해 벼를 자르고 터는 일까지 직접 해야 한다. 처음엔 삐뚤빼뚤했던 모내기가 어느새 이양기를 쓴 것마냥 반듯할 때 느껴지는 쾌감은 형용할 말이 없는 수준이다. 노동은 즐거운 것이었나 하는 착각까지 든다. 많은 것들을 지워내고 일에만 몰두할 때 그 일을 터득하고 숙련하면서 느껴지는 기쁨의 크기는 결단코 작지 않았다. 다만 노동한 만큼 보상받지 못하는 현실 세계에서의 성취감이 빛바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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