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흡 매일노동뉴스 회장
박승흡 매일노동뉴스 회장

폭염의 계절. 시원한 평양냉면, 동치미 막국수 한 그릇이 그립다. 평양냉면과 막국수는 메밀이 낳은 민족의 음식이다.

겨울철 음식이던 평양냉면은 여름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강원도를 대표하는 막국수는 전국 어디서나 즐겨 먹는 음식으로 진화했다. 구황작물로 민족의 삶 속에 자리 잡은 메밀에 선조들은 주목했다. 노란색 뿌리, 선연한 핏빛 줄기, 녹색 잎, 흰색 꽃, 검은 열매의 메밀은 오방색을 품고 있다. 선조들은 생명을 주관하는 천지의 기운인 오행을 담은 오행식물(五行植物)이자 오방지영물(五方之靈物)로 메밀의 품격을 한껏 높였다. 그 품격에 더해 현대 과학은 메밀이 지닌 루틴(비타민 P)의 효능을 입증했고, 모든 세대가 메밀을 참살이 식품으로 즐기고 있다.

조선의 별미, 의병의 소울 푸드

조선 후기 문인 홍석모의 <동국세시기(1849년)>에는 11월 음식으로 평양냉면, 동치미, 골동면을 소개하고 있다. “메밀국수를 무김치와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를 섞은 것을 냉면이라 한다. 관서지방의 냉면, 그 가운데서도 평양냉면의 맛이 가히 일품이다” “작은 무로 담근 김치를 동침(冬沈)이라 한다” “메밀국수에 잡채, 배, 밤, 쇠고기, 돼지고기, 참기름, 간장 등을 넣어 섞은 것을 골동면이라 한다.” 조선 후기에 이미 평양냉면은 민족의 세시풍속으로 즐긴 겨울철 별미였다.

춘천시 발간 <춘천백년사>에서는 막국수 유래를 구한말 의병 봉기로 밝히고 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뒤 춘천에선 의암 유인석 선생을 필두로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일제의 폭압으로 의병 가족은 산에 몸을 피해 화전을 일궈 연명했다. 춥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이 화전민의 주식이었다. 국수를 뽑는 틀도 없던 시절, 맷돌로 찧은 메밀가루를 반죽해서 칼로 뚝뚝 잘라서 면을 만들고 심심한 동치미 국물에 말아 투박한 한 끼 밥상을 차렸다.

칼싹두기라 했다. 의병들의 메밀칼싹두기가 오늘날의 막국수로 이어졌다. 평양냉면과 막국수는 동치미에 말아 먹는 메밀국수라는 점에서 같은 뿌리다. 동치미는 고려시대에 기록이 확인되는 우리 김치의 근본이다. 무, 소금, 물이 햇볕과 바람과 별과 함께 숨 쉬며 빚어낸 맑고 시원한 풍미의 원천이다. 그렇게 동치미는 오랜 세월 메밀과 짝을 맞춰 민족의 DNA가 된 것이다.

시인 백석은 작품 ‘국수’에서 계속 묻고 있다. “(중략)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겨울밤 쩡하니 닉은 통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이 그지없이 枯淡(고담)하고 素朴(소박)한 것은 무엇인가(중략)”.

지금 메밀을 원한다면?

여름 휴가철이다. 잠시 멈추고 쉬어가는 평화의 시간, 메밀을 만나도록 하자.

동해로 떠난다면 봉평 ‘미가연’에서 오봉순 메밀 장인의 손맛과 메밀 음식의 품격을, 서해로 간다면 막국수 성지 홍천 장원막국수를 이끌었던 정종문·이경희 부부의 강화 ‘서령’에서 평양냉면과 막국수가 한 뿌리임을 느낄 것이다. 제주도에선 안덕 ‘한라산아래첫마을’에서 제주산 메밀로 만든 골동면(메밀비빔국수) 비비작작면을, 서울에서 보낸다면 은평 ‘만포면옥’에서 동치미 평양냉면의 진수를 경험해 볼 것을 권한다.

봉평미가연
봉평미가연
강화 서령
강화 서령
제주 한라산아래첫마을
제주 한라산아래첫마을
은평 만포면옥
은평 만포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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