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혜경 노동법 박사
▲ 유혜경 노동법 박사

대한노총은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연맹(이하 ‘독청’이라 함) 활동을 통해 성립됐다. 이 때문에 대한노총의 성립과 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청의 성립배경과 성격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청은 1945년 12월21일 좌익청년단체 통합체인 ‘조선민주청년동맹’이 결성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우익정치세력이 주도해 결성한 조직이다. 특히 ‘신탁통치’ 문제로 국론이 양분되자 반탁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결성한 우익정치단체인데 독청의 강령은 당시 8·15 이후 전 민족적 요구였던 일제와 그 잔존세력인 친일파 척결 등의 구체적 요구가 결여된 추상적이고도 모호한 자주독립·민족공생에 근거한 민주정권 등이었다.

대한노총 창립의 기초적 상황은 당시 군정청광고국 노동과 직원이며 후일 군정의 초대 노동부 차장을 역임한 박택의 증언에서 엿볼 수 있다. 박택은 당시 독청 청년부장이며 공장을 운영하던 기업인 김구(金龜, 독립운동가 김구와 다른 인물)에게서 1946년 정월 전평에 대항해 우익사상을 지닌 사람도 노동조합운동을 할 수 있는지 문의를 받았다. 우익세력에 의한 조합 결성을 적극 찬성했던 박택은 김구에게 조합 결성을 권장하며 결성 방법과 노조가 반드시 갖춰야 할 요건을 설명하고 기타 필요한 자료를 주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이 당시 김구는 경영자이고 노동자들이 공장자주관리운동의 일환으로 공장 접수를 시도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박택을 만났다는 것이다. 사실상 김구는 노동자의 이해나 이익과 상반되는 경영자로서 사용자였다는 점에서 노동조합 설립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그런 만큼 대한노총의 노동조합성에 관한 정체성 문제가 제기된다.

어쨌든 이러한 배경하에 1946년 3월10일 서울 시천교당(侍天敎堂)에서 우익민족진영 지도자(독립운동가 김구·안재홍·조소앙 등)의 참석 아래 대한노총이 창립했다. 대한노총은 독청 출신 홍윤옥을 위원장으로, 이일청·김구(金龜)·이찬우를 부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대한노총의 선언문과 강령

대한노총 선언문의 주요 내용은 ‘민주정치하에 균등사회’를 건립하는 것이었고 강령은 ‘민주주의와 신민주주의(新民主主義)의 원칙에 따라 건국에 이바지 함, 완전독립과 건국을 위해 자유노동과 총력을 발휘해 헌신함, 심신을 연마해 진실한 노동자로서 국제수준의 질적 향상을 도모함, 혈한불석(血汗不惜, 피와 땀을 아끼지 않음)으로 노자(勞資) 간 친선에 이바지 함, 전국노동조합의 통일을 이룩함’이다.

노동조합의 목적이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및 노동자의 지위향상이라고 했을 때 대한노총은 근로조건의 유지·개선이라는 구체적 요구를 전혀 제기하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좌익세력에 영향을 받는 노동조합일지라도 전평이 일제강점기 동안 줄곧 제기돼 온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확립, 유급휴가 실시, 14세 미만 유년(연소)노동자 고용금지 같은 구체적인 요구들을 강령으로 구체화한 것과 구별된다.

대한노총의 성격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의 새로운 노동정책을 강구하기 위해 1946년 6월 일본에 파견된 미국의 노동문제 전문가(미국 전시 노동위원회위원) 중 서울을 방문한 일부위원이 당시 대한노총 지도층이었던 홍윤옥과 김구(金龜) 등과 면담한 후 대한노총을 분석한 기록문서에서 대한노총의 성격이 단적으로 확인된다. 그 문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한노총에서는 회원 노동조합이 경영측과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것을 부적절한 처사라고 보고 있음. 둘째, 조선이 독립되면 대한노총도 해체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음. 셋째, 대한노총에서는 임금, 작업시간, 또는 그 밖의 노동조건 개선과 연관된 정책을 수립하거나 강구한 일이 없음. 넷째, 대한노총이나 그 하부조직(local unions) 대표가 경영측과 임금이나 고용조건에 관해 협의한 일도 없고 임금인상을 원하지도 않으며 이 시점에서 노동자들이 경영측에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음. 다섯째, 대한노총 또는 지부 간부일 경우 작업일, 주당 작업시간, 그 밖의 노동조건에 관해 지금까지 경영측과 토의한 일이 없고 원칙적으로 일당 노동시간이나 주당 작업시간을 제한해서도 안 되며 필요할 경우 하루 24시간이라도 노동해야 한다고 하거나 나아가 현 임금수준이 전체적으로 생계비를 충당하는 데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있음.’

이 같은 ‘반노동조합주의적 성격’을 이유로 미국의 노동문제 전문가는 대한노총을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킬 것을 미군정 당국에 요구했는데, 이는 결국 대한노총이 ‘우익세력의 급조된 반조합주의적 정치단체’였음을 밝힌 것이다.

“전평과 대한노총에 대한 미군정의 태도”

미군정청 노동부는 전평을 좌익정치집단에 의해 통제되는 집단으로, 그리고 대한노총을 극우집단(extreme rightist groups)이 구성한 정치조직으로 파악했다. 미군정은 두 집단이 모두 정치적인 성격이 강한 조직으로 파악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고 전평과 대한노총을 모두 똑같은 정치집단으로서 동등하게 평가하려고 했던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전평은 미군정에서 극심하게 탄압을 받았지만 대한노총은 미군정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육성됐다는 느낌까지 받게 된다.

전평을 탄압했던 미군정의 실제 의도는 무엇일까. 전평을 향한 미군정의 태도에 관련해서는 한편으로 미군정의 좌익세력 탄압의 와중에서 전평이 갖고 있는 ‘특정한 정치적인 성향(좌익성)’ 때문에 탄압받았다는 입장과 다른 한편으로 미군정 당국이 의도하는 ‘노동조합주의의 실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탄압받았다는 입장으로 나뉜다.

특정 정치적인 성향, 즉 좌익세력으로 규정돼 전평이 탄압받았다는 입장(9월 총파업 음모설)은 다음을 근거로 든다. 첫째, 미군정이 1946년 9월에 철도노조 쟁의가 일어났을 때 노조를 교섭 상대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파업을 유발하고 전평을 철저하게 탄압함과 동시에 대한노총을 내세워서 전평을 완전히 배제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는 것이다. 둘째, 1946년 9월 철도 쟁의 이전에 일어난 동양방적 쟁의(1946년 5월 발생)에서 노동국의 약속배반으로 이어지는 고도로 의식적인 전평 궤멸을 위한 미군정의 음모였다는 것이다.

이에 상반되는 입장은 미군정의 진정한 의도는 전평 탄압에 있었다기보다 노동조합주의적 노동운동의 틀 안에 전평을 묶어 두려는 것이었고 그러한 대응 와중에서 미군정은 조합주의적 노동운동의 싹을 대한노총에서 찾게 됐다는 것이다.

미군정이 9월 총파업을 미리 알고 준비하고 있었는지는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946년 5월에 일어났던 동양방적 쟁의시 미군정은 타협의 결과 나온 ‘동양방적 쟁의의 타협방안’을 전면 뒤집어서 실행하지 않음으로써 쟁의를 이끈 전평을 전면적으로 부정했다는 점, 또 1946년 9월 파업(철도 쟁의)시 철도 경성공장 노동자들의 식량지급 요구에 경찰과 우익청년단체들을 동원해 파업 가담자를 연행·제압함으로써 사실상 철도국 경성공장의 전평 조직을 실질적으로 와해했다는 점에서 미군정이 전평을 탄압·배제의 관점에서 대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9월 총파업 음모설은 확신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미군정이 전평에 대한 고도의 적대적 인식 속에서 전평을 궤멸시키려고 했던 의도가 있었다는 것만큼은 존재했다고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군정이 주장하는 일체의 정치투쟁을 전면 배제한 완전무결한 경제투쟁적 노동조합주의는 오늘날의 노동운동이론에서도 타당하지 않다. 더구나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는 일제 식민지 지배하에서 고도의 억압과 착취가 진행됐고 그러한 반제투쟁 속에서 노동운동이 발전한 사실에서 볼 때 당연히 노동조합운동이 민족해방이나 자주독립국가 실현 운동과 결합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정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나아가 미래의 국가정치체제가 결정될 8·15 이후의 긴박한 정치정세하에서는 노동운동이 그동안의 압제적 요소인 일제 잔재 및 친일파 청산 요구, 임시정부 수립을 통한 자주독립국가 수립 요구,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 요구 등 정치투쟁과 긴밀하게 결합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노동조합이 일반적으로 근로조건의 유지·개선을 통한 노동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향상에 그 목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경제적 요구투쟁과 더불어 긴박하고도 중요하게 요구되는 정치투쟁이 결합되는 방향으로서 노동조합 활동이 전개되는 것은 필연적이고도 당연했다고 이해해야 한다.

둘째, 대한노총에 대한 성격을 분석해 보면 미군정의 의도는 더 정확히 드러난다. 대한노총은 탄생 과정과 그 성격에서 볼 때 오로지 전평에 대립하고 전평을 타도하기 위해 등장한 고도의 우익정치단체였다. 노동자의 지위를 개선하고자 하는 일체의 요구를 전혀 갖지 않았던 창립 당시 강령의 한계, 지도부인 김구(金龜)가 사용자 지위를 갖고 있었던 점, 그리고 창립 당시 군정청 광고국 노동자직원이며 후일 군정의 초대 노동부 차장을 역임한 박택이 우익인사에 의한 조합결성을 김구(金龜)에게 적극 권장하고 이를 도와준 상황에서 대한노총이 창립됐다는 사실에서도 이는 명백하다. 만약 ‘정치성’ 그 자체가 문제였다면, 그래서 ‘노동조합주의 실현’을 미군정이 진정 목적으로 삼았다면 그 대상은 오히려 대한노총이었어야 했다.

셋째, 전평이 좌익이 주도하는 노동조합이라는 사실에서부터 1945년 8·15 이전의 역사적 사실을 사상한 채 8·15 이후의 제한된 시간의 범위에서만 우익정치단체였던 대한노총과 동등하게 평가할 수 없다. 이것은 8·15 이후 조선인민공화국이 좌익에 의해 주도됐던 것과 똑같이 이해될 수 있는데, 그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목숨을 내걸고 싸웠 활동가들이었다는 점이다. ‘똑같이’ 정치적이었다는 식의 단순한 비교는 구체적인 역사를 배제하는 오류를 드러내는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도 전평도 당시 광범한 대중의 지지 속에서 등장했고 대중의 신뢰를 받았던 사실은 중요하다. 그러하기에 전평은 대한노총과 구별된다.

넷째, 미군정의 의도는 하지 장군의 첫 석 달간의 점령에 관한 주목할 만한 보고서의 요약에서 나타난다. “미국의 한국점령은 정치·경제적 나락의 벼랑에까지 이르고 있음이 확실한데 이런 표류를 멈추기 위해서는 매우 가까운 장래에 국제적인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행동이나 남한에서의 완전한 주도권 장악이 필수불가결하다.” 이 글은 미군정의 이해가 주요하게 드러난다. 미군정은 한국의 개혁이나 미래에 대한 국민의 정당한 요구에 주목했던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그들의 확고한 지위를 위한 확실한 주도권 장악이 필요했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제치고 친일우익세력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결국 이승만-한민당과의 결속, 조선인민공화국의 해체, 전평의 몰락, 대한노총에 대한 옹호,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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