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지옥 안 가고 천국에 가려면 착하게 살아” 서구의 종교는 죽음 이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들이대 인간을 계도했다. “역사가 너희를 심판하리라” 반면 동양에서는 후손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심판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이 있었다. “이번 생에서 잘 살아야 다음 생에 좋은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어” 삶의 중단으로서 죽음 이후의 심판과 지속되는 삶으로서 역사적 심판이 겹치면 삶과 죽음이 섞여 힌두적 윤회가 된다.

지금 작동하는 권력에 영향을 받거나 지금 옳다고 생각한 제도에 따르는 법의 심판보다 훨씬 넓은 사람들의 인식과 훨씬 긴 맥락에서 보는 역사의 심판이 진실을 잘 드러낼까. 잔혹했던 독재권력은 국민에게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들이대면서 독재를 정당화했다. 그런 권력에 대한 공포를 넘어 맞선 청년들은 “역사의 부름 앞에 부끄러운 자 돼 조국을 등질 수 없어 나로부터 가노라”며 투쟁의 한길로 나아갔다. 이건 벌써 오래된 과거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이 힘든 사람들에게 죽음 이후의 심판도 나중에 이어질 역사도 개소리다. 자본주의의 저성장기에 여러 가지를 포기 당한 n포세대는 “이번 생은 망했다(이생망)”며 절망을 드러내 왔다. 거대 양당이 번갈아 권력을 잡는 것도 윤회를 닮았지만 단순하고도 좀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윤회다. 그런데 개인의 취업과 주거를 비롯한 무너진 삶보다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개차반으로 만드는 훨씬 강한 충격이 있다. 인류의 이성과 과학에 대한 신뢰와 놀라운 기술력이 기후위기라는 전대미문의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역사에 대한 믿음은 마약이었을까. 뽕 맞은 인류는 이제 깨어나는가.

그렇게 들이대는 것은 권력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고 난 후의 심판이나 아주 먼 내일의 역사적 평가가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회적 지능’이다. 그런데 서로 교감하고 공감하며 지금 이 순간을 더 나은 시간으로 만드는 우리의 사회적 지능은 어느 수준인가. 저성장기에 더 불안해진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안전망을 더 넓고 탄탄하게 구축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실업급여를 깎으려는 여당이 실업급여를 농락하며 만든 ‘시럽급여’라는 말에서 역사는 후퇴하고 있다. 실업급여가 안전망이 되는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기득권 엘리트들의 사회적 지능이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드러낸다.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은 우리를 휩쓸고 있는 사회적 재난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교사의 죽음 그 자체로도 아픔이고 충격이다. 그런데 이런 사건을 대하는 기득권 엘리트들의 태도에 더 깊은 충격을 받는다. 교육부 장관이 학생 인권 때문에 교권이 무너졌다면서 학생의 인권을 공격한다. 학생 인권은 억압되고 교사의 권한은 늘려야 하는 것인가. 반대로 학생의 인권은 늘리고 교사의 권한은 제한돼야 하는가. 이런 대립적인 제로섬 사고는 낮은 사회적 지능을 드러낸다.

학생의 인권과 교사의 노동권은 모두 존중돼야 한다. 이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간단한 것이다. 사회적 지능이라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며 타자의 권리에 대한 인정이다. 교육부 장관을 비롯해 인권에 적대적으로 들이대는 모든 것은 권력이다. 학생 인권이 지나쳐서 교사의 교권이 무너진 것처럼 대립시키는 것, 이런 식으로 타인의 인권에 대립시키면서 들이대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 권력이다. 권리와 구분되지 않는 권력이 교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서로를 존중하는 권리는 ‘이생망’이라는 생각이나 자살에 이르는 것을 방지한다. 서로 존중할 때 여기 있어서 좋다는 공동체 감각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강남의 일부 학부모가 그랬듯이 그들이 교사에 퍼붓는 것은 권력이다. 이런 권력이 사람을 질식하게 한다.

나눔은 왜 시혜가 되는가

권력은 소수 엘리트의 것이고 권리는 다수 시민의 것이다. 권리는 누구에게나 적용되기에 보편적이고 개방적이지만 권력은 일부만 가지는 특수하고 배타적이다. 권력의지가 넘치는 기득권 엘리트에게서 권리에 대한 이해와 존중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에게 동화된 일부 시민은 권리에 대한 적대감을 곳곳에서 드러낸다. 북한을 공격할 때는 인권을 매우 매우 강조하지만, 그들이 대한민국에서 학생 인권이나 소수자 인권을 위해 노력한다는 자부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이 인권을 존중하는 가치로 보는 것인지 누군가를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하는지 곱씹어 보길 바란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들이 가진 힘을 사용해 분배하는 것은 사회적 정의를 위한 것일까. ‘시럽급여’ 논란에서도 보았듯이 그들은 작은 안전망이라도 제공하는 것을 자신들이 베푸는 시혜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가 던져주는 떡고물이라도 받아먹고 살려면, 불쌍한 놈들답게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하라고 한다. 이런 엘리트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충고는 그다지 효과가 없다.

나눠주는 것을 받아먹는 사람과 당연한 권리라며 당당히 요구하고 누리는 사람의 표정은 다르다. 기득권 엘리트들이 권력으로 자원을 분배하는 것은 시혜와 잘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민이 권리로 자원을 취하는 것은 자부심이다. 인권이라는 개념도 지배자들에게 맞선 시민들의 투쟁을 통해 쟁취해 탄생했다. 그것은 지배자들의 패배와 시민 승리의 역사다. 그런 역사에서 시민 자부심이 솟아나고 축적된다.

사회적 지능 향상을 위해서

권리와 권력도 구분할 줄 모르며 파리한 권력의지만 남은 지배 엘리트들이 죽음을 두고 벌이는 환장 정치를 보는 것이 쓰리다. 폭우로 인한 재난이든, 권력 남용으로 인한 사회적 재난이 닥치면 책임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이 벌어지고, 진상조사나 수사로 나아가고, 서로의 의도에 충족하지 못한 진상조사는 결국 법정소송으로 이어진다. 파탄날 대로 험악해진 관계의 막장으로서 법원은 자율적 소통과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사회적 지능의 부족을 보여준다.

예쁜 사람들을 안다. 우리 주변에는 예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청각 장애인을 위해 노조에 최초로 인권부를 설치하고 수화 통역사를 채용한 노조는 인권을 아는 예쁜 사람들이다. 지역 사회의 청소년은 물론 아시아의 청소년들을 위해 모금하고 학교를 짓고 이웃들의 망가진 집을 고치면서 희망씨를 심는 사람들은 참 예쁜 사람들이다. 해고에 시달리며 장기투쟁을 하는 콜센터 노동자를 위해 여행을 지원하는 희망철도 사람들도 정말 예쁜 사람들이다. 사내복지라고는 누릴 손톱만큼도 없는 영세사업장을 위해 기금을 모으고 선물을 나누는 풀빵 사람들도 예쁘다. 집단성은 높지만 사회적 지능이 떨어지는 기성노조 밖에 있는 노동시민의 노조할 권리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사람들이 정말 예쁘다. 이런 사람들이 고시 따위에 합격한 엘리트들보다 사회적 지능이 훨씬 높다.

사회적 지능을 올리는 가장 유력한 길은 시민 자력화다. 인권이론에도 등장하는 자력화는 그동안 인류 역사에서 누군가 대신해서 빵과 장미를 주는 것보다 스스로 빵과 장미를 쟁취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실천적 경험 끝에 나온 결론이다. 우리 사회에서 각종 복지제도에 대한 정책적 논의들은 넘친다. 패거리 정치가 극성인 상황에서는 그런 논란은 더 시끄럽게 벌어진다. 그 모든 정책적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권리 사각지대 시민이 권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시민에게 권리가 충만할 때, 엘리트의 권력은 위험에 처하고 그런 위협을 느껴야 그들은 시민 권리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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