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울행정법원 청사 전경. <자료사진 홍준표 기자>

근로계약의 직접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업무에 직접 관여했다면 ‘실질적인 사용자’에 해당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계약의 형식이나 법규 내용과 관계없이 실질적인 근로관계를 기준으로 사용자를 판단해야 한다는 기존 판례 태도에 따른 취지다. 대법원은 2020년 4월 ‘사무장 병원’에 취직한 직원이 의사와 근로계약을 맺었더라도 실질적으로 병원을 운영한 사용자와 실질적 근로관계가 형성됐다면 사무장이 사용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바 있다.

다른 계열사가 해고 ‘실질 사용자’ 쟁점

17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재판장 정용석 부장판사)는 외국계 광고·홍보업체 I사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해고구제 재심판정취소 소송에서 최근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A씨는 2018년 7월 미국에 본사를 둔 외국계 그룹의 계열회사인 M사와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무기계약직으로 입사했다. 의약학 데이터를 대상자에게 알맞은 형태로 전달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분석하는 ‘메디컬라이터’였다. 그런데 M사가 2년 뒤 갑자기 “경영상 이유로 청산하게 됐다”며 2021년 1월 근로계약을 종료했다.

A씨는 노동위원회로 달려갔다. 하지만 상대방은 M사가 아닌 자매회사인 I사였다. I사가 실질적 사용자라는 이유다. 지노위는 “I사는 공동으로 사용자 지위에 있고 근로계약 종료는 경영상 해고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며 구제신청을 인용했다. 중노위도 같은 판단을 내리자 I사는 소송을 냈다. 사측은 “A씨의 사용자는 M사”라며 서로 다른 별개 법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I사가 ‘실질적 사용자’라고 판단했다. 채용과 인사관리 등 전반에 걸쳐 M사가 아닌 I사가 관여한 부분이 근거가 됐다. 재판부는 “A씨는 I사 대표의 제안에 따라 근로계약을 체결하게 됐다”며 “M사가 연봉·직급 등 조건을 결정하는 데 실질적으로 관여했다고 볼 만한 사정을 발견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실제 영문 근로계약서에는 I사 대표가 M사를 대표해 서명했다.

A씨가 소속 구분 없이 I사 직원들과 섞여 근무한 부분도 I사의 사용자성을 뒷받침했다. I사 수석부사장 B씨를 통해 업무지시를 받은 것으로도 조사됐다. 재판부는 “A씨는 M사 소속 임원이 아닌 B씨로부터 이메일을 통해 업무지시를 받았다”며 “M사 임원이 A씨에게 직접 업무를 지시했다고 볼 사정은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법원 “채용·징계 등 인사권 포괄적 관여”

I사가 직접 A씨의 징계에 개입하기도 했다. A씨는 입사 넉 달 만에 징계해고됐다가 노동위의 부당해고 판정에 복직했지만, 경영상 사유로 소속팀이 해체돼 휴직을 명령받았다. 이후 휴직기간 연장 논의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견책’ 징계를 받고, 경위서 미제출을 이유로 ‘감봉’ 징계가 내려졌다. 당시 징계위원장은 I사 수석부사장인 B씨였다.

이와 관련해 재판부는 “B씨가 A씨의 상급자임을 전제한 다음 A씨가 출석 요청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상사의 명령에 불복했다는 이유로 징계처분을 하기도 했다”며 “실질적인 사용자가 I사라고 전제하지 않는 이상 B씨가 형식적으로 M사 소속인 A씨의 상급자가 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근태 관리와 징계 등 M사 인사권을 I사가 포괄적으로 행사했다고 봤다.

재판부는 “별개 법인이라는 사정만으로 I사가 A씨의 사용자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며 “I사가 주장하는 사정들은 형식적 사항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I사는 중노위 판정이 M사의 법인격을 부정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재심판정은 실질적인 근로관계를 기준으로 I사가 사용자 지위에 있다고 판단한 것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M사의 청산은 ‘사업 전체의 폐지’라고 볼 수 없다며 경영상 이유에 따른 해고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중노위를 대리한 임자운 변호사(법률사무소 지담)는 “사용자성은 해당 근로관계 안에서 판단해야 하는 것을 재차 확인한 판결”이라며 “재판부는 회사가 주장한 사정들은 형식적 사항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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