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전경.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사용자가 노동자와 퇴직금 지급기일을 연장하기로 합의했더라도 연장한 날짜까지 퇴직금을 주지 않았다면 범죄가 성립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당사자 간 합의로 퇴직금 지급일을 연장할 수 있도록 정한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퇴직급여법) 취지가 형사책임도 피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판단이다.

세탁업소 대표, 직원 4명 퇴직금 체불
1·2심 “합의 미이행까지 처벌은 과도”

16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지난 13일 세탁업소 대표 A씨의 퇴직급여법 위반 혐의를 무죄로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동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서울 강동구에서 세탁업소를 운영한 A씨는 직원 4명의 퇴직금 약 4천200만원을 지급하지 않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노동자가 퇴직할 때 지급사유가 발생한 날부터 14일 이내 퇴직금을 지급하도록 정한 퇴직급여법 9조1항에 따른 것이다. 이를 위반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사건의 쟁점은 퇴직금 지급일 연장에 관해 합의하고도 퇴직금을 주지 않았을 때 사용자를 처벌할 수 있을지다. 퇴직급여법 9조1항에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당사자 간의 합의에 따라 지급기일을 연장할 수 있다’는 단서가 있다. 1심은 A씨에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면서도 일부 직원에 대한 퇴직급여법 위반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A씨는 2005년 10월부터 2021년 5월까지 약 15년간 일한 B씨의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은 혐의를 받았다. 재판부는 A씨가 B씨와 퇴직금 지급일을 연장하는 합의가 이뤄졌다고 봤다. 그러면서 “퇴직급여법 9조의 단서 규정에 의해 기일연장에 대한 합의가 있은 후 연장된 지급기일을 지키지 않는 경우까지 처벌대상이 된다고 해석하기는 어렵다”고 판시했다.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사용자가 지급기일 연장에 합의한 경우 사후에 지급기일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은 민사적 분쟁해결 절차를 통해 묻도록 하는 것이 사용자와 근로자의 이해관계를 적정하게 조정하는 해석”이라고 설명했다. 퇴직금 지급사유 발생일부터 14일 이내에 ‘퇴직금 지급’ ‘지급기일 연장 합의’ 중 단 하나도 이행하지 않았을 때만 사용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의미다.

특히 합의된 지급기일을 지키지 않았을 때도 사용자를 처벌한다면 장기간이 흘러 퇴직금을 받거나 오랜 기간에 걸쳐 분할해 받기로 합의한 경우에 범죄 성립시기나 공소시효 기산점이 불명확해진다고도 봤다. 2심 역시 “사용자가 퇴직금 지급기일 연장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형사처벌 대상이라고 본다면 벌하고자 하는 행위가 합의 내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어 이를 확정할 수 없게 되므로 명확성의 원칙에 반한다”며 검찰 항소를 기각했다.

대법원 “연장 합의 조항, 형사책임 배제 아냐”

하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연장한 지급기일까지 퇴직금을 주지 않았다면 범죄가 성립한다며 원심을 뒤집었다. 대법원은 “퇴직급여법 9조 단서는 당사자 간 합의에 따라 지급기일을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에 불과하다”며 “연장한 지급기일까지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은 사용자의 형사책임까지 배제하는 취지라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노동자가 퇴직금을 조속히 받지 못한다면 부당하게 사용자에게 예속되기 쉽고 생활이 위협받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A씨의 경우 직원 B씨의 퇴직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한 날까지 전혀 지급하지 않아 유죄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사용자가 퇴직금의 지급사유가 발생한 날부터 14일 이내에 근로자와 지급기일을 연장하는 합의를 했더라도 연장한 지급기일까지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퇴직급여법 9조 위반죄가 성립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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