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박열은 1923년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른바 대역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사건의 실체는 없다. 박열은 잘 나가는 양반집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가서 이런저런 단체에 가입하지만 드러난 독립운동을 하진 않았다. 그는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을 피해 숨었다가 보호 검속에 걸려 체포됐다. 일본 경찰은 박열에게 폭탄 구매계획을 듣고 천황 암살 음모사건으로 과장했다.

부산 기장군 출신으로 일제 때 일본에 가 노동운동을 했던 김태엽씨가 1981년 출간한 회고록 ‘투쟁과 증언’(풀빛)엔 박열의 일본 유학생 생활이 아래와 같이 나온다.

“아나키스트 모임 흑우회 회원 중 박열이 있었다. 박열은 나(김태엽)와 동갑이었다. 박열은 사창가가 있는 슈사키에서 인력거를 끌면서 입교대학에 다녔다. 식사는 사회주의자 이와다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해결했다. 박열은 식당에서 일하는 여종업원 가네코 후미코라는 여자와 사귀어 열렬히 사랑했다.”

박열이 다시 유명해진 건 1927년 1월21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기사와 사진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이날 ‘법정에서 태연 포옹, 감방에서 양인(두 사람) 동거’라는 제목으로 재소자 박열의 근황을 소개했고 그 옆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껴안고 있는 사진까지 실었다.

격리 수감된 부부가 껴안고 찍은 사진의 충격은 컸다. 이 사진 때문에 당시 일본 내각이 총사퇴했다. 두 나라 언론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팩트는 간단했다. 폼 잡길 좋아하는 박열은 간수에게 법정에 출석한 자신과 아내가 같이 있는 사진 한 장을 찍어 달라고 간청했다. 간수는 사진을 인화해 박열에게 전했고, 감옥에서 박열의 사진을 본 일본인 재소자가 사진을 슬쩍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나와 신문에 넘겼다. 동아일보에 사진이 실렸을 땐 가네코 후미코가 옥사한 지 6개월 뒤였다.

박열은 1945년 10월 출옥해 일본에 계속 살면서 재일거류민단(민단) 초대 단장이 됐다. 박열은 김구와 이승만을 저울질하다가 이승만의 ‘반공주의’에 반해 그쪽으로 기울었다. 박열은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로 영구 귀국했다.

귀국한 박열을 취재한 조선일보 박성환 기자가 1965년에 출판한 <파도는 내일도 친다>엔 박열이 가져온 초대형 다이아몬드 얘기가 나온다. “박열이 귀국할 때 가져온 9캐럿 7푼짜리 다이아몬드는 일본 천황의 약혼 때 영국 왕실이 선물한 것이다. 조국에 돌아온 박열은 총리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 대통령과 몇 번 단둘이 만났다.” 다이아몬드의 행방을 묻는 박 기자에게 박열은 “비엔나에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비엔나는 이승만의 아내 프란체스카의 고향이다. 극좌와 극우를 오갔던 박열은 전쟁 통에 북한으로 가 거기서 1974년에 죽었다.

지난달 28일 윤석열 대통령은 두 개의 행사에 참석해 발언했다. 하나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한국자유총연맹(자총) 창립 69주년 기념식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재정전략회의’였다. 자유총연맹은 박열류의 반공주의 기치를 들고 1954년 반공연맹으로 출범해 지금에 이르렀다. 윤 대통령은 자총 행사에서 문재인 정부를 “무책임한 국가관을 가진 반국가세력”이라 칭했다. 윤 대통령은 같은날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선 “말도 안 되는 정치보조금은 없애라”고 주문했다. 민간단체에 주는 국고보조금을 대폭 줄여 내년 예산을 다시 짜라는 말이다.

1년에 나가는 국고보조금보다 훨씬 많은 돈이 이른바 3대 자생단체(자유총연맹, 바르게살기, 새마을운동협의회)로 간다. 우리 언론은 90년대까지 세 단체를 ‘관변단체’라고 불렀는데, 슬그머니 ‘자생단체’로 바뀌었다. 설립 배경과 행적을 보면 ‘자생력’이라곤 1도 없는데 이 단어를 사용한다. 정권의 전리품이 돼 버린 세 단체만 없애면 대통령이 원하는 재정 안정에 큰 도움이 된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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