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혜경 노동법 박사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1945년 8월15일 일본 패전 이후 1948년 8월15일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기까지 노동운동을 고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노동조합의 전국조직으로 존재했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출범과 활동이다. 따라서 전평의 결성, 행동강령, 주요 활동을 알아보자.

전평의 결성

전평은 1945년 8·15 직후인 9월25일 경성토건노조 사무실에서 사업장별 노조 대표들이 회동한 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칭) 준비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시작됐다. 전평 결성과정으로 보면 산별노조가 결성된 후 이들 산별노조를 모체로 결성된 것이 아니라 기업별 노조 대표가 주축이 돼 전평 결성을 결정했다. 전평 결성을 위한 준비모임이 거꾸로 산별노조와 전평의 출범을 실현한 계기가 됐다.

전평이 공식 출범한 것은 1945년 11월15일이다. 1945년 11월 5~6일 이틀에 걸쳐 서울에 있는 중앙극장에서 창립대회를 열었다. 창립대회에는 북조선 지역을 포함한 전국 40여개 지역 1천194개의 지부, 50여만명의 조직노동자를 대표하는 505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전평의 출범은 남·북조선의 모든 노동자가 직업적 연대를 기반으로 ‘전국 결집’을 실현한 하나의 성과였다. 산별노조와 이를 기반으로 하는 전평이라는 노동조합연합체 출현은 한국노동운동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 하나다.

전평의 선언문과 행동강령

출범선언문 주요 내용을 보면 “그간 주요 산업도시에서 전개된 노동조합운동은 모두 자연발생적, 지역적, 수공업적, 혼합형 조직체계를 벗어나지 못한 조합운동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주요 산업부분마다 단일 노동조합중심으로 전평 회원조직을 결성하고,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의 힘을 기반으로 자체적 조직역량을 강화해 참된 대중에 기반을 둘 수 있도록 모든 힘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만약 노동운동을 노동자의 당면한 경제적 이익추구를 위한 투쟁에 국한시켜 이에 만족하고 정치적 투쟁을 무시하고 억제한다면, 이는 곧 조합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며 이와 반대로 노동자의 일상적 이익을 위한 투쟁은 외면한 채 정치적 투쟁만을 저돌적으로 고집한다면 이 또한 대중과 유리된 좌익소아병적 경향이 아닐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경향을 반드시 극복해야만 한다”라고 적고 있다.

전평은 경제적 이익추구를 위한 투쟁에만 국한시키는 조합주의적 오류를 극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대중과 유리되는 좌익소아병적 투쟁도 모두 극복해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결합을 실현하려 했다.

일반 행동강령은 노동자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최저임금제의 확립, 8시간 노동제의 실현, 성·연령·인종에 구애받지 않는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지급, 주 2일 휴일제와 연간 1개월의 유급휴가 실시, 여성노동자를 위한 출산전후 2개월 유급휴가 실시, 유해·위험작업의 경우 7시간 노동제 실시, 14세 미만 유년(연소)노동자 고용금지, 일본제국주의자·민족반역자·친일파소유의 모든 기업을 공장위원회(관리위원회)에 보유·관리하기 위한 권리쟁취, 언론·출판·집회·결사·파업 및 시위의 자유보장, 농민운동에 대한 절대적 지지와 조선인민공화국 지지, 조선자주독립과 세계노동자계급 단결 만세 등이다.

일반 행동강령의 내용을 보면 노동자의 일상적 이익과 관련된 임금, 근로시간, 휴가 등에 대한 요구뿐 아니라 당시 조선 내 정치적 상황에 따라 요구되는 일본제국주의자 및 친일파 청산, 집회·결사의 자유보장,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지지라는 ‘정치적 요구’까지도 폭넓게 망라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전평이 일제시대 민족해방운동 일환으로 전개된 노동운동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경제적 요구 기타 정치적 요구를 전평이 폭넓게 포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전평은 친일우익 세력에 의해 급조된 대한노총이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와 관련된 요구를 하나의 행동강령으로도 제출하지 못했던 것과 대조된다.

기업해산수당을 요구하다

전평이 전개한 경제투쟁으로 해산수당 요구 투쟁, 공장관리운동, 경영참여운동이 있다. 이와 같은 경제투쟁이 전평 주도하에 얼마나 심도 깊게 전개됐는가를 평가할 수 없는 것은 한계다. 다만 여기서는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이런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그 정당성을 평가해 보려는 것이다.

해산수당 지급 요구는 전평이 처음으로 주장한 행동방침이기보다는 8·15 이후의 조업이 중단 또는 폐쇄된 공장과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행한 자발적 요구를 전평이 후일 공식화한 것이다. 해방 직후 일본 기업인이나 관리자들이 사업장에서 사실상 추방되고 공장운영도 불확실하게 되자 노동자들이 그간의 강제저축 등을 통해 체불된 임금, 퇴직금 및 상여금을 지급하도록 요구했고 그것이 해산수당 요구의 시발이다.

전평은 지난 36년간 일본제국주의가 수탈해간 것을 되돌려 받는다는 의미에서 가능한 많은 금액의 해직수당을 요구할 수 있고 그러한 요구는 정당하기 때문에 공식적인 행동방침으로서 해산수당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공장주에 대한 이러한 지급 요구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상여금 등의 지급 요구를 모두 거부하는 입장을 취해 전평과 갈등을 일으켰다.

해산수당 요구는 기업해산과 나아가 노동자조직의 해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용관계의 종식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자기부정의 요구다. 이런 문제 때문에 전평 스스로도 보완책(지급된 해산수당을 기금으로 한시적으로 공장을 운영하는 방침 등)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해산수당요구투쟁이 요구됐던 배경을 고려할 때 그것이 ‘고용관계의 종식’을 방향으로 하는 것이 아닌 실질적으로 기업의 활동이 종식되는 상황(일제식민 지배층의 공장관리 방치나 공장·원자재 파괴 등)에서 그동안의 식민지 수탈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평가한다면, 이 운동은 식민지적 수탈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수당 요구인 점에서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일제식민지 시대(1931년) 일본인 성인 남성노동자의 경우 1.93원, 한국인 성인 남성은 0.92원으로 2배 이상 임금격차가 났다. 성인 여성노동자는 남성의 절반 수준의 임금을 받았다. 일본 성인 남성과 비교하면 4분의 1수준에 해당한다. 이러한 식민지 수탈구조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 세궁민(細窮民: 노동을 원하면서도 일자리가 없어서 거리를 방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실업자를 지칭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대중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일제 패망 후 일제의 수탈에 대한 보상의 요구는 당연하다.

일제 지배층이 버린 공장을 접수한 노동자

8·15 이후 노동자들은 일본인 사업체에 대한 접수운동과 함께 이들 업체에서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을 전개한다. 그래서 1945년 11월4일 현재 16개 산별노조 관할 728개 사업장에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됐다. 이들 공장 관리위원회가 구성된 사업체에서 작업하는 노동자는 무려 9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공장관리운동은 미군정의 규제대상이었다. 그 이유는 이 운동을 주로 좌익계열이 주도했다는 점과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이 시장경제 질서의 기반이 되는 자유로운 기업활동, 즉 자본 대 노동의 기본구조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운동으로서 파악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공장관리운동은 일본인이 생산설비를 파괴하는 것을 예방하고 이들이 원료나 자재를 투매하는 것을 방지해 조업을 보장하며 조선 경제의 토대가 되는 기간시설을 보호하고 생산을 지속시키기 위한 차원에서 전개됐기에 이러한 운동을 ‘자본주의 질서 파괴’로 보는 미군정의 태도는 당시 조선의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형식적 자본주의 체제의 옹호라고 생각된다.

노동법제 하에서 생산관리는 근로자 스스로 기업경영을 담당하는 행위로서 사용자의 지배·간섭을 전면 배제해 사유재산제도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으로 평가돼 쟁의행위의 방법상 그 정당성이 일반적으로 부정된다. 그러나 사용자의 악의적인 생산태업에 대응해 기존 생산방침의 범위 내에서 평상시 행해지던 근로를 계속하는 경우는 그 정당성이 상실될 수 없다. 이런 예외적 상황이 그 정당성 측면에서 고려된다면 일제 패망 후 일제의 사용자 등이 기업시설을 일방적으로 방치·훼손·파괴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노동자 스스로 생존을 위해 ‘공장 자주관리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것으로 봐야 한다. 전평은 노동자의 자주관리운동을 노동자계급의 가장 공명정대한 주장이라고 보아 정식 노동운동 방침으로 수용했고 그런 만큼 미군정과의 갈등이 유발됐다.

노동자 경영참여운동의 정당성

노동자의 경영참여운동은 당시의 사회환경에서 조합이 시도한 일종의 타협적 성격의 운동이다. 사용자에게 임금인상과 근로조건의 개선, 무엇을 생산하고 생산된 제품을 어디에서 얼마에 판매할 것인지, 생산조직과 생산방법 등 경영 전반을 노조와 협의할 것을 제의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한 활동이다.

그러나 미군정 관리기업 하에서 이러한 노동자측의 요구는 모두 거부됐다. 그 이유는 고용조건과 관계없는 조합의 요구를 배제해 모든 조합활동을 철저한 경제적 조합주의(경제적 조합주의란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굳게 단결해 직접적인 근로조건 기타 근로자의 대우 등을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전개시키는 것에만 국한해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말한다)로 유도하고 특히나 경영권을 기업인의 권한이며 영역임을 명시함으로써 시장경제 질서를 조성하려는 것이 당시 미군정 노동정책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부정하는 미군정의 노동정책은 노동부가 각 지방노동행정 담당관에게 시달한 공문에서도 확인된다. 1947년 5월29일 노문(勞文) 184호 ‘노동조합운동의 지도에 관한 건’의 지시문 중 4항에 “노동조합 또는 조합원의 다음과 같은 행위는 그 권한 이외의 것임을 이해할 것, 즉 기업주 또는 정당한 대표 혹은 그 대리인의 기업경영의 정당한 권리행사를 간섭, 억압 또는 강제하는 행위, 특히 피고용인의 채용·해고 등 인사권은 기업경영권 일부로 노조가 이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할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종속노동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종속노동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노동법의 이념상 노동관계에서 제기되는 요구나 투쟁 등은 근로자의 종속노동의 지위에 영향을 주는 제반 문제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동대중의 요구는 근로조건과 노동자의 대우에 관한 개선뿐 아니라 근로조건과 직·간접으로 관련되는 모든 요구로 확대되고 특정 시기에는 정치투쟁 자체도 허용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경영참여운동은 그 목적상 정당하다. 따라서 전평이 실시한 ‘경영참여운동’을 자본가의 경영권을 전면적·근본적으로 침해하는 것으로 바라본 미군정의 태도는 문제가 있다.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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