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대표(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근래 몇 군데 사업장의 위험성평가에 대해 자문역할을 수행했다. 마침 고용노동부의 위험성평가 고시가 개정되면서 여러 혼란과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노사가 나름의 진정성과 의지를 가지고 함께한 과정이기에 서로에게 좋은 경험이 되고 있다. 함께한 사업장의 노사 모두에 가장 감사한 기억으로 남은 것은 청소·경비·식당 등 사업장 내의 모든 노동자들의 위험에 대해 평가대상으로 포함하자는 우리 센터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준 것이다. 사업장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대부분의 청소·경비노동자들은 용역업체를 통해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다. 구내식당 노동자들도 해당 사업장이 아니라 구내식당 운영을 위탁받은 업체에서 나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뿐인가? 공장의 한구석에서 포장만 전담하는 외주인지 파견인지 알 수 없는 노동자, 주기적으로 공장에 들어와서 공사 수준의 정비작업을 하는 외부업체의 노동자들, 입고나 출하 과정에서 늘 마주치는 화물노동자들까지. 이미 하나의 사업장이 그 사업장 소속의 노동자들로만 돌아가던 시절은 지난 지 오래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이들 작업에 대한 위험성평가는 해당 사업장의 법적 의무사항이기도 하다.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안전보건 확보의 의무는 대부분 소속 사업주가 아닌 사용사업주에게 있으며, 도급업무에 대한 위험성평가는 도급·수급사업주의 각각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문 과정에서 이 노동자들을 놓치지 말자고 강조한 이유는 법적 의무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노동이 늘 사각지대에 있어 위험이 관리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실질적인 위험을 찾아 제거하는 것이 위험성평가의 본질 아니던가?

하지만 이러한 법·제도의 취지와는 달리 현실의 안전보건행정과 사업장들의 인식은 여전히 형식에 얽매여 있다. 대표적인 것이 ‘50명 미만’ 사업장이라는 기준이다. 산업안전보건법이 소규모 사업장들의 현실을 감안해 안전보건관리체계 등 일부 사업주의 의무를 면제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직접적인 안전조치와 보건조치 의무에는 예외가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50명 미만’이라는 기준은 면죄부처럼 작동하고 있다. 안전보건행정 역시 ‘50명 미만 사업장’은 감독의 대상이 아니라 지원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다. 소규모 사업장은 원래 그런 것이니 감독이 이뤄지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한다. 방호장치를 끄고 기계를 돌려도 어쩔 수 없고, 그러다 사람이 죽으면 그제야 세상에 조금 알려진다.

앞서 언급한 다양한 노동자들의 면면을 다시 뜯어보자. 과연 ‘50명 이상’ 사업장들은 다를까? 소속은 수백 명 규모의 용역회사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고작 2~3명이 함께 일하는 청소·경비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휴게실에서 쉴 수 있을까? 대기업의 캐터링브랜드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하는 급식 조리노동자들은 조리흄을 피할 수 있을까? 50명을 갓 넘기는 사내하청 업체의 노동자들은 자기가 쓰는 화학물질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고 있을까? 노동자로 인정도 못 받고 대형 물류회사에 ‘노무를 제공하는’ 화물노동자들은 과로사로부터 안전할까? 이들의 위험은 관리되고 있는가?

이미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해진 고용구조 속에서 노동자수를 기준으로 안전보건관리에 차등을 두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방식이 돼 버렸다. 이는 감독만이 아니라 안전보건 지원정책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대부분의 지원제도가 ‘50명 미만’ 사업장만을 대상으로 정하고 있다. 대표적인 산업보건서비스기관인 근로자건강센터를 위탁운영하는 안전보건공단 역시 사업장 단위 서비스를 50명 미만 사업장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는 사각지대의 노동자들을 제대로 챙길 수 없다.

사실 산업안전보건법 곳곳에는 사업장 규모 외에도 불합리한 낡은 기준들이 남아 있다. 사무직·연구직 등 특정 직종에 대해 차별적인 기준을 두는 것부터 공공행정과 학교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일부 법조항을 적용하지 않는 것도 대표적인 구시대적 기준이다. 이런 낡은 틀이 현장에 미치는 해악은 생각보다 엄청나다. 산업안전보건법을 전면적용받는 현업노동자에서 배제된 노동자들에게 적용되지 않는 법조항은 안전보건관리체계 등 일부에 불과하지만 아직도 학교나 공공기관에는 본인들이 산업안전보건법 전체를, 나아가 산재보험도 적용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노동자와 관리자가 넘쳐 난다. 낡은 제도가 현장을 망쳤고 망가진 현장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이제 낡은 틀들을 과감히 버릴 때가 됐다. 직종이나 사업규모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위험에 관리의 손길이 닿도록 만들어야 한다. 고용구조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책임자가 그 위험을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 위험성평가와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있다.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는 위험성평가가 실재하는 위험에 대한 예방대책을 강구하는 방법론이라면, 중대재해처벌법은 예방의 책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방법론이 제대로 작동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중대재해처벌법 개정을 앞두고 경총은 구시대적 주장을 반복하고 있지만 한 번쯤은 나무가 아닌 숲을 바라봤으면 한다. 재계가 줄기차게 모호하다고 주장하는 ‘경영책임자의 정의’는 계약의 형식이나 명칭과는 무관하게 실질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을 책임자로 한다는 현실적인 규정을 통해 예방체계가 작동하도록 만든다. 그들이 너무 포괄적이라고 주장하는 ‘경영책임자의 의무’는 사실상 제대로 된 위험성평가를 중심으로 하는 예방활동이 핵심이다.

안전보건 정책이 중대한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지금 시점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이 보여준 새로운 전망을 훼손한다면 이 변화는 처참한 실패로 귀결될 것이다. 또 다른 쟁점이 되고 있는 50명 미만 사업장에 대한 법 전면적용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업규모로 책임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용을 예정대로 시행할 때 숨어 있고 흩어져 있던 ‘책임’들이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그와 함께 작은사업장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사각지대, 취약한 영역에서 제대로 된 지원방안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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